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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昌王'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蔥叟 2008. 4. 7. 02:56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昌王'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국립부여박물관>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은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1995년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 절터 목탑터의 심초석 위에서 발견되었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은 높이 74cm, 가로·너비가 각각 50cm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윗면이 둥근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사리 장치는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하여 마치 오늘날의 우체통처럼 생겼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감의 형태는 독특하며, 삼국시대 사리장치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昌王'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百濟昌王十三秊大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창왕(威德王)13년(567년)에 누이동생인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百濟昌王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여기서 '昌王'은 백제 27대 위덕왕의 이름이다. 위덕왕의 이름이 '扶餘昌'이기 때문이다. 즉 창왕은 생전의 이름이고, 위덕왕은 시호이다. 또 '兄公主'라는 말은 오늘날 쓰이지 않는 용어이지만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에서 맏공주를 의미하는 '上公主', '長公主' 등과 뜻이 같다고 보아 성왕의 맏딸, 즉 위덕왕의 맏누이동생으로 보여진다.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이 부왕의 위업을 기기 위하여 567년 만들었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十三秊大歲在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은 한성백제의 몰락과 웅진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그복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지만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그처럼 비명에 간 부왕을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목탑을 짓고 사리를 공양했을 것이다. 

 

丁亥妹兄公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사리감의 명문 내용은 우리 나라 고대 기록의 내용과 일치하며, 기록이 빈곤하여 잘 알 수 없었던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主供養舍利

 

   백제시대에도 문자를 사용하여 역사를 전하고 다양한 정보와 물품의 왕래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문헌이 남아있지 않지만, 돌이나, 토기, 기와, 나무 등에 문자가 남아있어 우리에게 백제의 문자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금석문(金石文)으로는 무령왕릉 지석, 사택지적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출토된 유적에 대한 정보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외에도 '상부(上部)', '전부(前部)' 새김표석(標石)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토기에도 용도나 사용처 등을 기록한 간단한 문자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관북리 등 부여 일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완, 뚜껑, 뚜껑바리, 시루, 단지 등의 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와에 기록된 문자로는 주로 부명을 새긴 것이 많은데 이는 기와의 공급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도 성(城)이름, 간지, 사용처 등을 기록한 것과 단순히 숫자 등을 새긴 것이 있다.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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