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국립부여박물관, 모형복제품>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사비도성을 감싼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경사면에서 발굴되었다. 이곳은 일명 능산리 절터라 불리던 곳으로 사비백제시대의 왕릉군인 능산리 고분군의 월찰인 능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건물터 옆에 부속된 공방터 바닥의 물통에서 전대미문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높이 62.5cm, 무게 11.8kg의 초대형 금동향로였다.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모형
향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아래로부터 크게 똬리를 틀고 머리를 수직으로 곧추세우고 향로를 떠받들고 있는용으로 표현한된 받침대, 피어오르는 앙련으로 나타낸 향로의 몸통부분, 그리고 신선이 노닌다는 봉래산과 봉황으로 표현한 뚜껑부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향로의 이름도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고 불렀다. 용은 동양에서 신성한 동물로서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동시에 물의 신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용은 수중을 상징하고, 연꽃이 물에서 피는 식물임을 감안하면 향로 몸통은 수상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꽃잎 가운데에는 물고기와 새 같은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인간이 표현되었다.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모형
뚜껑은 이상적인 신선세계를 상징하는데, 제일 위에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잇는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반구형의 뚜겅에는 25개의 큰 산과 49개의 작은 봉우리가 중첩되었고, 그 사이에 17명의 인물과 36마리의 동물이 표현되었다. 인물들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인데 머리를 감거나 낚시하고, 때로는 말을 타고 활을 소거나 코기리에 올라타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 중에는 완함(阮咸, 월금), 피리, 북, 현금, 배소(排簫)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도 있다. 동물은 곰, 호랑이,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상상 속의 동물, 멧돼지 등이며 포수와 괴물도 있다. 뚜껑에는 10개 새의 목덜미에 2개의 구멍을 뚫어서 향이 스며나오도록 설계되었다.
▲금동대향로 몸체와 뚜껑(복제품)
대향로 뚜껑부분인 봉래산의 정상에는 깃털과 벼슬, 부리, 발가락 4개 등 세밀한 표현으로 꼬리를 길게 날리고 양날개를 퍼득이며 막 비상하려는 기상 높아 보이는 한마리 새가 있다. 눈은 아래의 산을 내려다 보는듯 하고 날개와 뒷 꽁지에는 화염문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부위와 몸통은 둥근구슬로 연결되어 있고, 보주 바로 밑 목덜미에는 향연구멍이 두개 나있다.
봉황은 고대로 부터 신성시 여긴 상상의 새이다. 수컷을 匪, 암컷을 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周書>에 이르기를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 한다. <설문해자>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악집도>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을 날아 지나 지주의 물울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산해경>에서도 '이새는 먹고 마시며 절도에 맞고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적혀있다.
▲금동대향로 몸체와 뚜껑(복제품)
또한 예로부터 갑골문에서는 상제의 사자, 또는 천자의 상징으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천자의 대궐을 봉궐, 천자의 수레를 봉거, 천자가 도읍한 곳을 봉성, 궁중의 연못을 봉지라고 하였다. <고려사>의 [악지] 당악조의 여러 歌穡에는 봉황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대체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선적인 분위기 즉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고 찬미하는 의미로 등장한다. 이것은 중국음악의 전래와 함께 유입된 중국적인 사고이며 이는 다시 조선시대로 계승된다. 이처럼 고대로 부터 성군의 덕치를 증명하는 징조로서도 봉황이 등장한다.
▲금동대향로 받침대(복제품)
또한 봉황은 춤과 음악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것은 옛날 순임금이 태평지치를 이룩하고 소소라는 악기를 연주할 때 봉황이 와서 놀았다는 고사에 따라 군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의미로 쓰였음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봉황은 새중의 으뜸으로서 크고 고귀하고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사랑하는 남녀나 천정연분을 의미하고, 지절이 굳고 품위를 지키는 새,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금동대향로 받침대(복제품)
그러면 금동대향로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이 수수께기를 푸는 열쇠는 금동대향로가 발굴된지 2년 후에 나타났다. 1995년 능산리 절터 목탑터에서 발굴된 사리감에 새겨진 명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리감에는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라고 새겨져 있다. 대체로 백제의 위덕왕 즉 창왕이 즉위한 후 13년이 되는 서기 567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것이다.
▲금동대향로 봉황(복제품)
<삼국사기>의 위덕왕 관련 기록에 보면 “위덕왕은 이름이 창(昌)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라고 되어 있어 위덕왕이 곧 창왕임을 알 수 있다. 즉 위덕왕이 누나인 공주와 함께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 불교적 의식과 행사를 거행하면서 사리를 공양했다는 것이다. 능산리 절터가 성왕을 비롯한 사비백제의 왕릉이 밀집한 능산리 고분군에 인근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찰의 성격이 단순한 절이 아니라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다고 보여진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따라서 금동대향로를 만든 목적도 성왕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6세기 중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항쟁의 역사, 그리고 성왕과 위덕왕 사이에 벌어진 사연이 얽혀있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성왕의 이름은 부여명롱이다. 성왕의 시호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백성들이 붙여준 시호였다. 백성들은 성왕을 매우 존경하여 그가 제위하고 있을때부터 성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결국 성왕은 죽어서도 시호로 불리게 된다. 이는 성왕이 백성들과 신하들 모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훌륭한 임금이라는 소리이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성왕은 개로왕이 장수왕 앞에서 죽임을 당한후 평생의 목적인 고구려 정벌을 위해 오랫동안 칼을 갈아왔다. 그리고 신라와 연합하여 드디어 고구려 정벌을 위한 평양공격을 위한 대군을 출병시켰다. 그런대 돌연 신라가 경기도 지역을 급습하여 평양을 위해 출군하였던 백제군의 본대는 보급로가 막혀 고구려영토안에 고립되어 모두 괴멸당하고 만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이는 백제의 거센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이 멸망할수 밖에 없던 고구려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백제의 다음목표가 자신들일 거라는 두려움이 일던 신라와의 모종의 밀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성왕때 백제는 고구려 멸망을 이룰수 있을만큼 왕권도 강하였고 국력도 강하였으며 고구려는 내분으로 인하여 백제의 이러한 공세를 막아낼 재간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신라의 돌연 배신으로 인하여 한강유역을 다시금 빼았기게 되자 분노에 찬 성왕은 대대적인 복수전에 돌입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신라와는 화친을 맺고 신라의 마음을 안심시키게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백제의 모든신하들은 이러한 성왕의 계획에 반대를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성왕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성왕의 태자인 아들 부여창(위덕왕)이었다.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부여창은 스스로 관산성 싸움의 선봉으로 나설것을 자처하고 관산성을 향해 출전한다. 이때는 백제군뿐만 아니라 가야군과 일본군의 3국 연합세력이 관산성을 향해 출전하였다. 백제군의 거센 공격에 신라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관산성도 함락직전에 상태에 넘어갔다.(일각에선 함락까지 했다는 주장도 있음)
▲금동대향로 뚜껑 인물상(복제품)
성의 함락이 눈앞에 남았다는 말에 기쁜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성왕은 겨우 50명의 기마병들만 이끌고 아들 부여창을 응원하기 위해 관산성앞으로 가던 중 때마침 그곳에 매복해있던 신라군 노비출신의 천민 고도(苦都)앞에 사로잡히고 만다.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았기고 웅진성에서의 잇단 부하들의 반란으로 수많은 왕들이 죽임을 당하여 왕권은 땅에 떨어진 순간에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고치면서 백제의 국력을 다시금 강화시켰던 성군 성왕의 최후는 그렇게 노비의 손에서 비참하게 끝나고 만다.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부여창은 자신을 응원해주려다가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전사소식에 통곡도 못하고 급히 신라군의 포위를 뚫고 백제로 귀환하지만 이미 전사자는 3만명이 넘었을 정도로 참담하였고 모든 책임을 지고 부여창은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중이 되려고 하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실패한다. 즉위기간 내내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버리지 못한채 무겁게 왕위에 오른 위덕왕은 즉위기간 내내 신하들의 눈총을 받으며 어렵게 백제의 숨맥을 이어간다.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위덕왕 재위 전반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시기였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위덕왕은 부왕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반면 재위 후반은 이러한 악몽을 떨쳐내고 전반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재위 전반과 후반을 가로지르는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 능사의 건축이고 사리의 공양이었다. 그리고 비명횡사한 부왕의 영혼을 달래고 기나긴 악몽을 떨쳐내고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몸체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뚜껑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뚜껑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뚜껑 동물상(복제품)
▲금동대향로 뚜껑 동물상(복제품)
<2008. 3. 16>
'◈한국문화순례◈ > 금강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미륵보살입상(金銅彌勒菩薩立像) (0) | 2008.04.23 |
---|---|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音菩薩立像) (0) | 2008.04.23 |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昌王'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0) | 2008.04.07 |
부여 관북리 출토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0) | 2008.04.06 |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宿世…'먹글씨 목간(墨書銘木簡) (0) | 2008.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