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관북리 출토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시대의 유일한 돌비석으로,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이었던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세운 비이다. 일본인들이 부여에 신궁(神宮)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도로에 깔려고 부여 읍내에서 초석이나 지대석 등을 모아두었는데, 그 석재 속에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이다. 높이 102㎝, 폭 37.9㎝, 두께 29㎝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면은 앞면을 다듬어 가로, 세로 7㎝인 정방형 선으로 금을 그어, 그 안에 한 자씩 글씨를 새겨 각 행에 모두 14자씩 4행으로 모두 56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동그라미 안에 봉황을 새겨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비문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유행한 사륙병려체(四六騈驪體)로 된 아름다운 문장이 담겨있고, 글씨에서는 웅건한 힘이 느껴져 당시의 문화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사택지적(砂宅智積)은 생몰년을 알 수 없는,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으로 대좌평(大佐平)의 직에까지 올랐다.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씨(砂宅氏 또는 沙宅氏, 沙氏로 약칭되기도 함) 출신으로 나지성(奈祗城)을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일본서기》고교쿠기(皇極紀) 원년(642) 7월조에 대좌평 지적(智積)이 나오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을 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을 종합해 보면, 사택지적은 642년(의자왕 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백제로 돌아온 뒤, 654년 노재상(老宰相)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642년에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된 왕권의 대귀족(對貴族) 통제력에 말미암은 것이다. 사택지적비는 그가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含聖明以
“갑인년(654년, 의자왕 14년으로 추정) 정월 구일에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뚫어(금속을 다루어) 보배로운 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우니, 높이 솟은 금당의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神光)을 내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우뚝한 탑의 늠름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성명(聖明)한 정기를 지니고 △△하는 듯하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이 비는 불교와 관련있다는 주장과 도교와 관련 있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사택지적비문을 통해 드러난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어떻게 불교와 연관성이 있는가를 당시 성왕-위덕왕-의자왕이 통치하던 백제의 시대상황과, 사택지적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통해 알아본다. 전남 구례에 있는 화엄사 각황전에는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 등 3불 4 보살이 모셔져 있다. 이 절은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고 절의 이름은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왜에 불교를 전파한 성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성왕은 신라의 배신으로 회복한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다시 신라에게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사한다. 그런데 이 관산성 전투를 적극 주장하고 선봉에 나선 이가 태자 창, 즉 위덕왕이다. 즉위할 때부터 험난했던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뒤를 이어 불교를 옹호하는 한편 백제의 위상을 다시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따라 불교를 중시했다는 증거의 하나로서 일본의 호류지 고문서에는 "백제의 위덕왕은 서거한 부왕인 성왕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만들었다. 즉 그것은 구세관음상으로서 백제에 있던 것이다"는, 현재 일본의 국보인 구세관음상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한편, 성왕이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자처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백제의 중흥을 이끌려는 위덕왕이 자신을 전륜성왕-대통지승여래-석가모니불로 이어지는 법화경의 내용을 현시하기 위해 자신을 법화신앙을 따라 전륜법왕의 첫째 아들인 대통불로 내세웠을 수 있음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부여의 대통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면, 그것은 성왕-위덕왕을 거쳐 백제의 중흥을 이끌려는 백제 왕실의 어떠한 신성성을 강조하여 나라의 위기를 종교에 의한 내부 단결력으로 타개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한편, 당시 불교가 왕의 지지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사택지적은 백제의 대성팔족의 귀족씨인 사택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인 지적은 불교의 지적보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화경의 내용중 ‘법화경 12장 제바달다품’에는 석가와 문수보살, 지적보살의 대화가 나온다. 자세한 불교의 교리는 알 수 없지만 지적보살이 석가와 문수보살과 관련이 있는 보살임을 알 수 있고, 윗부분에 첨부한 성왕 시기에 창건한 화엄사의 3불 4보살 역시 이러한 연관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택지적이 이러한 불교의 성격을 띈 이름이며, 성왕 혹은 위덕왕 시기에 태어나 왕의 측근으로 활동한 사람이라면, 사택지적비의 비문은 도교의 성향을 띤다기 보다 불교의 성향을 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비문의 내용 중 “옥을 갈아 보탑을 세우니” 라는 부분이 있는데, 보탑이 일반 탑이 아닌 다보탑을 의미한다면 석가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땅에서부터 솟아나왔다는 다보탑의 의미를 통해 사택지적비의 불교적 성격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부분을 종합해 보면, 성왕과 위덕왕의 시기는 왕이 불교를 수호하던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 대좌평을 낼 정도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택지적은 그 이름과 성향이 불교와 연관이 있을 수 있음을 추측해 보았다. 또한 법화신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적보살은 석가와 문수보살 등과 같이 언급되며, 불상들이 그 증거로서 남아있는 불교의 대표적 인물이라 볼 수 있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지적 역시 불교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해 봄으로써 사택지적비는 불교와 관련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택지적비에 나타난 사택의 ‘슬픔’을 단순한 슬픔이 아닌 ‘(비분)강개’ 로 해석한다면, 이는 의자왕과 귀족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정변, 642년(의자왕 2년)에 내좌평 기미 등 유력귀족 40여 명을 왕이 추방한 정변의 와중에 은퇴한 사택지적이 개인이 늙음을 슬퍼했다기 보다는 왕이 귀족을 탄압하니 나랏 일이 걱정되고, 한편 그 높던 권세와 영화가 덧없음을 깨닫고 읊은 ‘슬프고 분하고 원통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의자왕이 유교를 따랐으며 ‘해동증자’로 불렸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정치노선의 갈등이 아닌, 이전의 구세력을 지난 왕들의 그림자와 함께 귀족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던 의자왕이 구세력을 대표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새로운 이념 <유교>로써 새로운 통치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한편 백제에는 왕이 될 수 있는 성씨는 부여씨(扶餘氏)였지만 중앙에서 권력을 차지하며 최고의 관직을 독점한 유력한 성씨인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있었다. 사씨(沙)ㆍ협씨(脅)ㆍ해씨(解) ㆍ진씨(眞)ㆍ국씨(國)ㆍ목씨(木)ㆍ연씨(燕)ㆍ백씨(苩)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백제 중앙정계를 주름잡았으며 때때로 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들 성씨들은 일정한 지역을 근거지로 세력을 형성하여 성장한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수도를 옮기면서 새로운 세력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신진 세력 성씨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전쟁의 승패에 따라 기존 성씨들이 몰락하기도 하고, 새로운 성씨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왕의 측근이나 백제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이들 성씨 출신들에 의해서 정국이 움직이는 귀족정치라 할 만큼 최상위 귀족들의 힘이 막강하였다.
진씨와 해씨는 한성시기부터 유력한 세력으로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멸망할 때까지 권력을 행사하였고, 목씨는 마한의 중심세력인 오늘날 천안 일대에 기반을 둔 목지국이 백제로 통합되면서 중앙 정게에 진출한 유력한 성씨였다. 사씨ㆍ연씨ㆍ백씨는 백제가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후에 득세한 성씨로 새로운 지역에 기반을 둔 토착 성씨였다. 사택지적비에 나오는 사택지적의 성은 사택 또는 사씨인데 사씨는 특히 사비 천도 이후 최고 귀족가문이 되었다. 이는 사택씨가 성왕의 사비 천도시에 적극적으로 왕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사택지적은 혼자의 힘으로 절을 짓고 탑을 세울만큼 대단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사택지적비는 말해주고 있다.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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