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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향기를 찾아서 - (5)경주 황룡사터

蔥叟 2007. 11. 14. 08:08

원효의 향기를 찾아서 - (5)경주 황룡사터

 

   원효는 일생을 통하여 두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첫번째 시도는 육로로 요동까지 갔다가 간첩으로  붙들려 돌아오고, 두번째는 11년 뒤에 해로를 통하여 입당하려다 당주에서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다.

 

*황룡사 강당터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라 하니 성은 김씨다. 나이 스물아홉에 서울의 황복사(皇福寺)에 가서 출가하였다. 얼마 못되어 서방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참관하고자 하더니 드디어 원효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길을 잡아 나가다가 변경의 수비군에게 간첩으로 붙들려 수십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놓여 돌아왔다.(이 사건은 최후의 본전과 원효의 행장에 실렸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

 

   '의상전'에 보면, "영휘(650~655) 초년에 의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智儼)을 찾아뵈었다"고 말하나 '부석사본비(浮石寺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탄생하여 나이 어려서 승려가 되었더니 영휘 원년 경술(661)에 원효와 동반하여 서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여 고구려까지 갔다가 난리가 나서 되돌아왔으며 용삭원년(661)에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 지엄의 문하에서 배웠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황룡사 강당터

 

   삼국시대에는 스님이 간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간첩스님은 고구려의 도침으로 장수왕의 간첩으로 백제의 개로왕에게 급파되어 백제를 멸망케하였다. 여기서 난리라함은 고구려-당나라 간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2차 입당 시도에서 일체유심조를 깨닫는 이야기가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에 자세히 실려있다.

 

   (의상의)나이 약관에 당나라에서 교종이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원효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유학할 뜻을 가졌다. 일행이 본국의 바닷가 당주(唐州) 경계에 이르러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꾀하였다. 중도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하는 수없이 길가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바라보니 바로 고분 속 해골 옆이었다. 가랑비는 계속 추절거리고 땅은 진창인지라,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워 머무르느라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또다시 연도 안에서 잠을 자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귀신들이 나타났다. 원효가 크게 느낀 바 있어 말하기를, "어젯밤에 잘때는 동굴이라 여겨서 편안하였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소굴이란 생각에 저주가 많구나. 그러니 알겠도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오, 온갖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인 것을'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거늘 어찌 밖에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라고 하고는 보따리를 챙겨 신라로 되돌아 갔다. 의상은 홀로 남자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

  

*황룡사 강당터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1922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는 원랑선사탑비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원랑선사(?∼866)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원랑선사는 문성왕 18년(856) 당나라에 유학하여 11년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 귀국한 뒤 월광사에 머물렀다.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이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체로 순몽이 쓴 것이다. 탑비는 원랑선사가 돌아가신 후 진성여왕 4년(891)에 세워졌다. 이 탑비에 원효성사가 성도한 곳이 직산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원효가 입적한 지 약 200여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다.

   

   師卽潛□憤悱 欲扣玄微 爰抵稷山 寓, 乃神僧 元曉成道之所也

   이에 선사는 곧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에 이르러 ……(4자 결락)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를 깨치신 곳이다.

 

<월광사터 원랑선사탑비>

 

   稷山은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 경부선의 한 작은 역으로 시의 북부에 자리잡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한 위례성이었다고 전하며 1914년에 천안군에 폐합되기까지는 구 직산군의 군청 소재지였다. 이곳이 원랑선사비에 나오는 직산이라면 바로 원효성사가 성도한 곳이다. 하지만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에는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닷가라고 하였는데 직산은 바다에서는 멀리 떨러진 내륙이다. 하지만 원효성사 사후 200여년이 지난 시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만은 없는 실정이다. 특히 원랑선사는 원효성사를 신승(神僧)이라 일컬어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고 있다.

 

*황룡사 강당터

 

   원효의 성은 설씨(薛氏)로 동해 상주(湘州)사람이다. 총각머리할 나이에 선뜻 출가하였다. 스승을 좇아 배웠으며, 여러 곳을 돌아다님에 일정함이 없었다. 힘써 뜻을 천착하였으며, 거칠 것 없이 글을 지었다. 씩씩하고 굳세게 나아갈 뿐 물러서지 않았다. 대개 삼학(三學 : 戒定慧)에 문득 통하였으니, 신라에서는 만인을 상대할 만하다고 하였다.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신의 경지에 들어 갔음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나라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니, 현장삼장의 법문을 사모하여서이다.

 

<송고승전 권4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ㆍ대안>

 

   삼국유사에는 원효의 탄생지가 압량 즉 현재의 경산이라 하였다. 하지만 송고승전에는 동해 상주(湘州)사람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해는 당나라에서 신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상주는 현재의 경북 상주를 가리킨다. 뭔가 원효와 상주가 매우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선사 서당화상비에는 '음리화 삼천당주인 급찬 고금口가 새기다'라고 적혀 있다. 음리화는 현재의 상주 지방을 일컫는다. 서당화상비를 새긴 사람 또한 상주 출신이라는 것이니 시사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원효성사가 언제 출가하였는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하지만 송고승전에 '관체지년(총각머리할 나이, 15~20세)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는데는 당시 동양 최고의 학승이었던 현장법사의 법문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는 기록도 나온다. 현장은 인도를 유학하고 645년에 귀국하여 대당서역기를 쓰고 각종 경전을 번역한 인물이니 그를 흠모함도 당연지사라 하겠다.

 

*황룡사 강당터

 

   그 인연이 이미 어그러지자 마음 닿는대로 가서 노닐었다. 얼마 아니되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거칠고 빗나간 행동을 하였으며, 거사와 한가지로 술집과 기생집을 출입하는 것이 보지(保誌)스님이 카과 지팡이를 차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혹은 소(疏)를 지어서 화엄경을 강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뜯으며 사당에서 노래하기도 하였다. 혹은 민가에서 자기도 하고 산수간에 좌선하기도 하였다. 마음 내키는대로 하니 도무지 일정함이 없었다. 그때 국왕이 백고좌 인왕경(百高座仁王經)대회를 베풀며 두루 큰스님을 찾았다. 고향에서는 명망이 있다고 그를 추천하였으나, 뭇 승려들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참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의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의사의 노력에도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 그리고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스런 사당에 기도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당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한다면, 이 병은 치료될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사자를 뱃길로 보내어 뱃길로 당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의술을 구하게 하였다.

 

   남쪽 큰바다 가운데서 문득 한 노인이 파도를 헤치고 나타나 훌쩍 배 위로 올라와서는 사자를 맞이하여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사자가 보니)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용왕을 알현 하였는데 이름은 검해(鈐海)였다. 사자더러 이르기를, "너희나라 왕비는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있으니, 이각(二覺)이 원통하고 보살행을 보여준다. 이제 왕비의 병을 증상연(增上緣)으로 삼아 이 경전을 부촉하노니, 너의 나라로 가서 유포할 따름이다"하였다. 30장 가량의 중복되거나 흐트러진 경전을 사자에게 맡기며 다시 이르기를,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잘못될까 염려스럽다"하였다. 왕이 칼잡이를 시켜서 사자의 장단지를 째고 그 속에 경전을 넣은 다음 밀랍 종이로 싸서 약을 발랐더니 원래대로 멀쩡하였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성자(大安聖者)가 순서를 매겨서 꿰메고 원효법사를 청하여 소(疎)를 지어 강석(講釋)한다면, 부인의 병은 틀림없이 나을 것이니, 설산(雪山)의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 할지라도 약효가 이것만은 못하리라" 하였다. 용왕이 바다 위까지 배웅하여 마침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황룡사 강당터

 

   그때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여 먼저 대안성자를 불러 편집하게 하였다. 대안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모습과 의복이 특이한데다 항상 시장터에서 구리로 된 바리때를 두드리며 '대안', '대안'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대안이라 이름한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하자, 대안이 말하기를 "그냥 경만 가져 오십시오. 왕궁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안이 경을 받아 배열하여 8품을 이루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합치되었다. 대안이 이르기를, "속히 원효에게 맡겨서 강연토록 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되오"라고 한였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은 곳은 출생지인 상주였다. 사자더러 이르기를, "이 경은 본각(本覺, 근원적 깨달음 그 자체를 의미함)과 시각(始覺,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점차로 수행을 쌓아 나가 이르게 되는 깨달음)을 종지(宗旨)로 삼으니,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해서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두시오"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레에서 소 5권을 지어 완성하였다. 왕이 날을 택하여 황룡사에서 강연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때 야박한 사람들이 새로 지은 소를 훔쳐갔기에, 왕에게 사실을 알리고 3일을 연장하여 다시 3권을 짓고 약소(略疎)라 불렀다. 왕과 신하, 신자와 승려들이 법당을 구름같이 애워 쌌다. 이에 원효가 열변을 토하는데 위의가 있고 얽힌 것을 풀이하는데 법칙이 있으며, 찬양하여 손가락을 튕기자 소리가 허공을 찔렀다. 원효가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난 날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는 비록 끼이지 못하여지만, 이제 대들보 하나를 놓는데 나 혼자 만이 할 수 있구나"라며 기염을 토하자, 참석하였던 명덕(名德)들이 얼굴을 숙이며 부끄러워하였다.

 

   애초에 원효의 행동에 항상됨이 없었고 중생교화에 일정함이 없었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고, 혹은 여러 곳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사2방에 죽음을 알리기고 하였으니, 이 또한 배도(盃渡)나 보지(保誌)와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 그 성품이 두루하여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에 광(廣), 약(略) 두 본이 있는데, 모두 본국에서 유행한다. 약본소(略本疎)가 중국에 수입되었는데, 나중에 번경삼장(飜經三藏)이 고쳐 논(論)으로 삼았다.

 

<송고승전 권4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ㆍ대안>

 

 

*황룡사 금당터

 

  황룡사 강당터에 서면 원효의 거침없이 일갈하는 무애행이 생각난다. 이 약본소는 중국에 까지 역수입되었으니 원효의 그릇을 짐작케 해준다. 황룡사 강당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유명한 백고좌회는 9세기에 도의선사가 행하게 되었다. 이때는 원효와는 정반대로 배척을 받은 것이었다.

  

   長慶 初에 道義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西堂 智藏의 깊은 法力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西堂 智藏에게 배워서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禪宗을 傳來한 스님이다. 분주한 망상에 얽매여서 北으로 달아나는 얕은 길을 옹호하고 뱁새가 날개를 자랑해서 남으로 길이 날아가려는 높은 의지를 비웃음이라. 종래로 敎宗에 心醉하여 禪法을 魔語라고 비방하였다. 이를 본 스님은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자기의 빛을 행랑채 아래에 감추고 자취를 깊은 곳(壺中)에 숨기었다. 신라의 王城을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마침내 설악산의 북쪽에 은둔하였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

 

   원효와 같은 그릇이 인정받을 수 있던 7세기는 신라의 욱일승천하는 기상이 살아있던 시기라면 도의선사와 같은 선진 사상이 배척 받은 9세기는 결국 폐망의 싹이 트던 시기였던 것이다.

 

*황룡사 목탑터

 

   원효는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고구려 원정에 동행하여 군사적 자문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짐작케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또한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668년)에 신라에서 청병을 한 당군이 평양의 교 외에 주둔을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 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 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를 하고자 유신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사람을 시켜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速還)는 말이다. 송아지(畵犢)와 난새(畵鸞)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에 군령으로 말하기를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다. 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

 

   그림에 송아지와 난새를 그렸으니 송아지를 그린 것은 화독(畵犢)이요, 난새를 그린 것은 화란(畵鸞)이니 각각의 반절은 화독은 혹(속)이요 화란은 환이니 합치면 속환이니 속히 돌아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2007.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