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향기를 찾아서 - (3)경주 요석궁터
<경주향교>
요석궁은 현재의 향교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설총을 낳은 후 원효는불교 대중화에 매진한다. 이때 불교는 대중들과는 상관없이 권력 상층부에만 존재하는 종교였다. 원효를 비롯하여 그의 스승격이었던 오어사의 혜공이나 황룡사의 대안같은 이들이 불교대중화에 앞장선 스님들이었다. 불교의 대중화란 일반 민중들에게 불교의 존재 내지 석가모니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었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無애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 는 문귀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 사람의 집), 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이 대목에서도 원효를 석가모니와 동일시하려는 신라인들의 마음이 물씬 묻어난다. 원효를 우리나라 말로 '첫새벽'이라고 불렀던 것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 일출을 바라보며 성도했던 것에 빗댄 말인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는 초저녁부터 한 밤중을 지나 새벽을 거치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룰암에 동짓날 해가 뜰 때 굴 안이 황금 빛으로 물들게 만들었던 것이나 경주 남산의 신선암에 동짓날 새벽녘 풍광도 마찬가지의 의도를 나타낸 것이리라.
현재 향교의 관리사 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하나 남아있다. 한변 길이 2m가 넘어 보이는 정사각형의 덮개돌 가운데에 지름 약 70cm 정도의 구멍이 뚫려있다. 요석공주와 원효성사가 이 우물의 물을 마셨을까? 설총은 이 물을 마시고 자랐을까?
*경주향교
*경주향교 명륜당
*경주향교 명륜당
*경주향교 서재
*경주향교 동재
*경주향교 우물
*경주향교 우물
*경주향교 우물
*경주향교 우물 내부
<2007.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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