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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蔥叟 2007. 5. 12. 02:33

창녕 술정리(述亭里) 동삼층석탑

 

   술정리(述亭里) 동삼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크기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위풍이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1965년 해체수리과정 중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용기가 발견되었다. 3층 탑신 윗면에 네모진 사리공이 있고 뚜껑 모양의 청동진형용기와 담황색의 수정사리병, 청옥색유리구슬 8개, 향나무편 등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수정사리병은 전국에 9개 밖에 없는 희소유물이며 특히 담황색 사리병은 이곳의 사리병이 유일하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기단 주변에는 탑을 구획지었던 탑구(塔區)가 마련되었고 기단에는 위, 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탑이 크고 자임새가 장중하며 휜칠해 기품있게 보인다.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이다. 이 탑의 명칭에 동(東)자를 붙인 것은 한 절터 안에 2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서가 아니고, 술정리에 두개의 탑이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탑의 높이는 5.75m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동삼층석탑을 찾으면 이 탑을 지키는 동탑 지킴이 혜일스님을 만날 수 있다. 혜일(慧日)스님(창녕 관음정사 주지)은 탑이 앓고 있다고 했다. 살아 있는 생물도 아니고 돌덩어리로 만들어진 탑의 아픔을 어떻게 알까.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고개가 끄떡여진다. 


   스님은 지난 8년 동안 창녕술정리 동3층 석탑과 같이 했다. 세속 나이로 오십대 중반이 넘은 스님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제주 관음정사에서 출가를 했다. 진신사리가 모셔진 국보 34호 창녕술정리 동3층 석탑과의 인연을 여쭸더니 꿈 이야기로 대신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스님은 제주양로원장을 하다 악성빈혈 때문에 건강회복을 위해 지난 92년 창녕으로 왔다. 지난 98년 양력 11월 7일, 그날의 꿈 이야기다. 12평 법당에 스님들이 꽉 차있는데 부처님이 ‘일선(一禪) 일어나라’며 아이에게 이름을 가르치듯이 손바닥에 ‘혜일(慧日)’아리고 써주시더란다.


   스님의 출가 법명은 일선이었는데 그때부터 스님은 자신을 혜일이라고 했다. 부처님을 따라 생전에 가보지 않을 길을 갔더니 탑이 있는 곳에서 ‘여기 있거라’라고 일렀단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꿈에 본 길을 되짚어 동탑을 만났단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그렇게 만난 국보 동탑은 너무나 초라했다. 엉망이었다고 하는 게 맞다. 주변 민가에서 담요를 내다 널어놓고 ‘풍탁’이 달렸던 옥개석에는 나일론 끈으로 시래기며 물미역을 걸어 놓았더란다. 아이들은 탑 위에 올라가는 것은 예사고 창녕시장이 가까워 어른들의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놀랬붓다 아이가. 담요를 걷어내고 아이들에게 내려오라고 했더니 사람들은 ‘어디서 날라 온 돌이 박힌 돌 뺄라 하노’라고 했어요.”


   그날부터 스님은 창녕 장마면 관음정사에서 버스를 타고 동탑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다. 동탑지킴이로 나선 셈이다. 물론 부처님 말씀이니 받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예삿일이 아니었다. 개가 몰려다니며 똥을 무더기로 싸놓을 정도라 주워 담으면 한 봉지가 넘었다. 국보 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스님이 당시 주민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전한 이야기. “주민들이 동명목욕탕은 알아도 동탑은 모릅디다.”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동탑은 불국사 3층 석탑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동탑이 1000년의 세월동안 사람들의 온기에 묻어, 부대끼며 살아온 게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스님의 생각은 다르다. “이렇게 방치됐는데 탑이 말을 할 줄 알면 ‘언제까지 나를 홀대할러할 겁니다.”


   주민들로부터 막말을 들어가며 묵묵히 보낸 2년. 청소를 하다 스님은 탑 옆의 비석에 새겨진 ‘국보’라는 한자를 그제서야 알아보게 됐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국보라는 것을. 스님은 군청을 부리나케 드나들며 따지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되레 스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더란다. “‘큰절에서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무슨 말이냐’며 옛날부터 탑은 그렇게 있었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탑신부

 

   2001년 겨울, 스님은 문화재청의 문화재지킴이 교육에 참여했다. 그때 참가자들과 문화재청 직원들을 앞에서 국보인 동탑이 제대로 관리도 안되고 엉망이라며 열변을 토했단다. 그게 약효를 발했는지 이듬해 동탑 문화재 보호비로 6억8000만원이나 내려왔다.


   “내가 가면 귀찮아하던 공무원들이 ‘아이구 스님 왔습니꺼’라고 할 정도로 태도가 확 바뀌었어요.” 그때부터 주변 민가 매입과 정비사업이 시작됐다.


   이듬해 스님은 한 가지 숙제를 더 풀어야 했다. “부처님 사리가 있었다는데 그러면 ‘그릇’을 찾아야겠다고 나섰지요.” 65년 탑 해체 당시 불사리장엄구(부처님사리를 넣은 함)가 나왔다는데 어디 있는지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기단부

 

    국립중앙박물관에 출퇴근하며 스님 표현대로 ‘맛이 간사람’처럼 아무나 만나면 찾아달라고도 했다. 그런 노력으로 실마리를 찾은 게 ‘한국불사리장엄구 유물목록’이라는 책자. 스님은 이 책자를 품에 안고 전율도 잠시 다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다른 사리구는 소장처가 있는데 동탑만 소장처란이 비어있었던 것. 그때부터 사리구를 찾는다는 유인물을 수도 없이 돌리고 수소문했다. 그러다 만난 이가 김해에 사는 탑연구가 윤광수 씨. 윤 선생이 인터넷과 문화재청, 국립박물관에 질의를 하고 찾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결국 38년간 묻혀있던 사리구 등 유물을 2003년 2월18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아다는 소식을 듣고 동탑 앞에서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부처님 찾았습니다’라며 눈물, 콧물 흘리며 108배를 했어요.” 3년 전 동탑 인근에 보호소를 마련하고 인근 탑금당치성문기비(보물 227호) 내용에 따라 인양사 이름을 건 불당도 차렸다. 동탑과 만난 11월 7일에는 매년 동탑제를 열고 있다. 지난 98년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몇 명 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몇 백명이 모여들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탑구(塔區)

 

   스님은 이제 지역민 모두가 동탑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보 33호인 진흥왕척경비는 안내판에 화장실도 있지만 동탑은 그렇지 못합니다. 척경비는 창녕입장에서는 치욕의 산물이고 탑은 자비심을 담은 것이지요.” 발굴에서 인양사 관련 자료를 찾으면 탑 이름도 인양사탑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기와에 절 이름을 새겼다는데 ‘인양사’라는 글자 하나만 나오면 좋지.” 스님의 바람은 많지 않다. 현재 기울어가는 동탑의 보존을 위해 탑 주변 주차장을 폐쇄하고 차량통행을 우회시켜야 한다고 했다. “탑 인근에 창녕군민들뿐만 아니라 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선방, 도량을 만드는 게 소원입니다.”

 

 

 

<2007.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