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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영흥사터(永興寺址)

蔥叟 2007. 3. 2. 06:22

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영흥사터(永興寺址)

 

영흥사는 흥륜사 다음가는 고찰이었으며 최초의 비구니(比丘尼) 사찰로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前佛時代七處伽藍之墟) 가운데 둘째는 삼천기(三川岐)로 지금의 영흥사’ 라고 하여 삼천기에 영흥사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천기란 동에서 흘러드는 문천(蚊川, 南川), 서에서 흘러드는 모량천(牟梁川, 大川), 남에서 흘러드는 인천(麟川, 內南川)의 삼천(三川)이 합류하는 지점을 말한다. 따라서 삼천이 합류해서 흐르는 서천변(西川邊)에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직까지는 그 위치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영흥사의 유래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진평왕 36년(614) 2월에 영흥사의 소불(塑佛)이 저절로 헐어지더니 얼마 안되어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36년조>


②영흥사는 흥륜사와 같은 연대에 착공했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조>


③흥륜사의 역사를 시작했던 을묘년(법흥왕 22년, 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세우고 사씨(史氏, 墨胡子)의 유풍(遺風)을 사모하여 법흥왕과 같이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했다.

<삼국유사 원종흥법(原宗興法)조>


④진흥왕비는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따라서 진흥왕 36년에 돌아간 비구니(尼僧)는 진흥왕비가 아니고 법흥왕비일 것이다.

<삼국유사 원종흥법(原宗興法)조>


이와 같이 영흥사는 흥륜사와 함께 전불시대칠처가람지(前佛時代七處伽藍址) 중의 하나인 삼천기(三川岐)에 세워졌으며 왕비가 주지로 있었던 중요한 절이었다. 왕비의 실제 인물에 대해서는, 영흥사의 소상이 무너진 후에 돌아가신 왕비가 법흥왕비 묘법이라고 한다면 묘법니(妙法尼) 는 100여세의 장수에다 법흥왕의 사후(540) 70여년을 주지로 있는 결과이니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또 「삼국유사」에 ‘법흥왕비가 영흥사에 살더니 몇 해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 몇해가 70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진흥왕비도 영흥사의 주지로 있었으니 「삼국사기」진평왕 36년조의 기록은 진흥왕비일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법흥왕과 진흥왕 의 왕비가 주지로 있었을 만큼 영흥사는 중요한 절이었고 동시에 흥륜사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친히 주지로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 두 절은 서로 이웃하고 있었을 것이며, 불교의 공인과 더불어 법륜(法輪)을 굴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서 깊은 사찰이었던 것이다.

 

 

                                                                                                            <2007.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