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영묘사터(靈妙寺址)
영묘사는 전불시대칠처가람(前佛時代七處伽藍址) 중의 하나인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졌으며 현재의 흥륜사를 영묘사로 추정하고 있다. 영묘사의 창건에 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영묘사는 경주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당(唐)나라 정관(貞觀)6년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으로서 체제가 특수하다. 신라 때의 불전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것은 다 무너지고 헐어졌는데, 홀로 이 불전만은 완연히 어제인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이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頭里)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하루 밤사이에 메우고 드디어 불전을 세웠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불우(佛宇)조>
창건에 관한 전설 외에도 영묘사는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지귀에 관한 전설은 천한 역리에 불과한 지귀가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기막힌 이야기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사회였다. 따라서 사랑과 성에 관하여 아주 자유로운 사회였다.
지귀(志鬼)는 신라의 활리역(活里驛) 사람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미모를 사모하여 근심하며 울고 지내다가 모양이 파리해졌다. 여왕이 불공을 드리려고 절로 행차하실 때 그 소식을 듣고 불렀다. 그는 절로 가 탑 아래에서 왕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버렸다. 왕은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얹어두고 궁궐로 돌아갔다. 후에 잠이 깨자 지귀는 간절히 번민하더니 이윽고 마음의 불이 일어나 그 탑을 뱅뱅 돌다가 불귀신으로 변했다. 왕은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문(呪文)을 짓게 하였다. 곧,「지귀의 마음 속의 불이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구나 창해(蒼海) 밖으로 띄워 보내어 보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으리라」하였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20 심화소탑(心火燒塔)조>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예술승(藝術僧)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된 곳이기도 했다.
중 양지는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으나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그 행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지팡이 머리에 자루 한 개를 달아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간다. 지팡이가 흔들려 소리가 나면 그 집에서 이것을 알고 재 올릴 비용을 집어넣는다. 자루가 다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사는 절 이름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으니 그의 신통하고 이상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다.
그는 여러 가지 재주에 두루 능통하여 비할 바 없이 신묘하며 글씨고 잘 썼다. 영묘사(靈妙寺)의 장륙삼존, 천왕상 및 전각탑의 기와와 천왕사 탑 아랫도리의 8부 신장, 법림사(法林寺)의 주존 삼존, 좌우의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 만든 것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이름 현판도 그가 쌌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한 개를 만들고 이와 함께 부처 3,000개를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가운데 두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빚어 만들 때에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잡념 없는 상태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온 성중의 남녀들이 다투어 가면서 진흙을 날랐다. 유행하는 노래에 일렀다. 『오라 오라 오라 / 오라, 서럽더라 / 서럽다 우리들이여 / 공덕 닦으러 오라』
지금까지 이 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힘든 일을 할 때는 다들 이것을 부르는데 이는 대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비용으로 곡식 2만3,700석이 들었다.
평하여 말하건대 이 스님이야말로 재주를 구비하고 덕행이 충실하였지만 큰 이물로서 작은 기술에 숨었던 자라고 할 것이다.
<삼국유사 양지석장(良志錫杖)조>
영묘사의 위치에 대하여 60년대 이후 두갈래 방향에서 비정(比定)이 시도되었다.
첫째, 1959년의 사라호 태풍 이후에 송화산 기슭아래 서천변에서 사찰의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신라시대의 초석과 함께 노출되었고, 이를 당시 홍사준 경주박물관장이 조사한 후 영묘사지로 추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부서오리(府西五里)」와 「본대택(本大澤)」, 『삼국유사』선덕여왕지기삼사조의 영묘사 옥문지의 기록 중 옥문지(玉門池)의 존재가 서로 부합된다는 점과 하상(河床)에서 출토되는 와편의 종류가 고려 및 조선시대의 것이 동시에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곳이 영묘사지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와편중에서 불에 탄 것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영묘사가 큰 화재로 소실되었음을 뒷받침한다고 보인다.
둘째, 1976년 신라문화동인회에서 현재의 오릉 북쪽의 금성로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현흥륜사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명의 문자명와(文字銘瓦)를 수습하여 현흥륜사를 영묘사터로 추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서는 「영묘(靈廟)」, 「영묘(靈妙)」, 「영묘(令妙)」, 「영묘(零妙)」등의 동류의 문자명와 및 벽돌이 계속하여 발견됨에 따라 신뢰성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전불시대칠처가림지의 하나인 영묘사가 사천미(沙川尾)에 있었다고 한 기록에서 사천(沙川)은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나오는 설총의 출생담에 ‘원효대사가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는 기록이 있고 ‘사천(沙川)은 곧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한다. 또한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사천은 곧 문천을 의미하며 이는 영묘사가 문천의 끝인 현재의 흥륜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묘사터(현흥륜사)
*영묘사터(현흥륜사)
*영묘사터
*영묘사터(현흥륜사)
*현흥륜사 이차돈 순교비
*현흥륜사 이차돈 순교비 상세
<2007.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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