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흥륜사터(興輪寺址)
흥륜사는 불법을 흥하게 한다는 이념으로 창건된 신라 최초의 국찰(國刹)이다. 당시 법흥왕은 흥륜사를 원시신앙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천경림(天境林)에다 짓고자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진흥왕 5년(544)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사찰이 완성되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고 사액(賜額)하였다. 절의 이름인 흥륜사(興輪寺)는 ‘불법의 바퀴(法輪)을 일으키는 절’이라는 뜻이니 불교를 공인하고 불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국가가 앞장서서 지은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법흥왕과 진흥왕은 모두 만년에 흥륜사로 출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진흥왕은 5년 3월부터 속인(俗人)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정식으로 허락하였다. 이는 왕실의 불교장려정책이 일관되고 적극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었던 만큼 후대에 와서 창건의 연원을 소급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때문에 미추왕 또는 소지왕대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머물렀던 모옥(茅屋)이 흥륜사의 전신이라고 하는 기록이 아직도 전한다.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첫째가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境林, 지금의 흥륜사)이요, 둘째는 삼천기(三川岐, 지금의 영흥사)요, 셋째는 용궁남쪽(龍宮南, 지금의 황룡사)이요, 넷째는 용궁북쪽(龍宮北, 지금의 분황사)이요,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 지금의 영묘사)요,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이요,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 지금의 담엄사)이니 모두가 전 세상 부처님 시대에 절터였던 곳이다. 불교의 전통이 오래 유전되었던 땅이니 네가 그곳에 가서 위대한 불교를 전파하여 마땅히 부처님을 예배하는 전통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아도가 (어머니의) 교훈을 받들고 계림에 이르러 왕성 서쪽 동리에 와서 머무니, 즉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요, 때는 바로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였다. 아도가 대궐로 임금을 찾아 뵙고 불교의 유포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도 못한 것이라고 의심을 가져 심지어 아도를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으므로 그만 속림(續林, 일선현으로 지금의 善山)에 있는 모록(毛祿)의 집으로 도망하여 3년 동안 숨어 있었다. 이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어 무당이나 의원에게 효력을 보지 못하고 칙사를 사방으로 보내어 의원을 구하더니 법사가 갑자기 대궐로 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이 매우 기뻐서 그의 소원을 물었더니 아도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아무 것도 청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짓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받드는 것이 소원일 뿐이외다.” 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공사에 착수할 것을 명령하니 보통 집이나 다름없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지붕을 이었다. 아도가 그곳에 살면서 불교를 강연하니 가끔 하늘꽃(天花)이 떨어졌으며 절 이름을 흥륜사라 하였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조)
흥륜사의 위치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조선시대의 관련내용들을 미루어 현재의 경주공고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공고 정원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들이 다수 남아있다.
흥륜사의 가람배치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흥륜사 오당(吳堂)의 주장 부처와 미타 부처님상과 좌우의 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이와 함께 그 불당을 금색 그림으로 채웠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嶊사)조>
②진흥왕 시대에 와서 흥륜사에 진자(眞慈)라는 중이 있어 매양 법당의 주장 부처인 미륵상 앞에 나가 발원하기를, “원컨데 우리 부처님이 화랑으로 몸이 화하사 세상에 나타나시면 제가 항상 당신의 모습에 친근하여 모든 바라지를 맡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하였다.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化未尸郞眞慈師)조>
③동쪽 벽에 서향으로 앉은 소상이 아도(阿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이요, 서쪽 벽에 동행으로 앉은 소상이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조>
④제54대 경명왕 때에 흥륜사 남문과 좌우 행랑채가 불에 타서 미처 수리도 못하였더니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두 중이 인연 가진 자들을 끌어모아 장차 수리하려 하였다. 정명(貞明) 7년 신사(922) 5월 15일에 제석(帝釋)이 절 왼쪽의 불경 쌓아둔 누각에 내려와서 열흘동안 머물매 전각과 탑과 풀, 나무, 흙, 돌 할 것 없이 다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집을 덮으며 남쪽 못의 고기와 용이 기뻐서 춤추어 날뛰었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는데 전에 없던 일이라고 탄복하면서 시주하니 폐백과 곡식 시주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제인바치들이 자진하여 와서 며칠이 못 되어 절 일을 완성하였다.
공사를 끝마치게 되자 제석이 장차 돌아가려 하는데 두 중이 아뢰기를, “천제께서 만약 대궐로 돌아가시려거든 거룩하신 얼굴 모습을 그려 모셔 지성으로 공양하여 천제의 은혜를 갚도록 하여주시고 또한 그 화상을 이 땅에 남겨두심으로써 길이 인간세상을 보호해주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천제가 말하기를, “나의 인앙력(願力)”은 저 보현보살이 오묘한 이치로써 천하를 두루 교화시킴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 모셔 경건히 공양을 베풀어 그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두 중이 교시를 받들고 삼가 보현보살을 벽에 그렸으므로 지금도 그 화상이 보존되어 있다.
<삼국유사 흥륜사 벽화보현(興輪寺壁畵普賢)조>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 흥륜사는 남문, 전탑, 금당, 강당 좌우경루 등이 좌우낭무로 연결된 구조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에는 주불인 미륵존상과 신라불교 사상 십성(十聖)으로 추앙 받는 열 분의 소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강당인 오당에는 아미타불상과 좌우협시보살이 소상(塑像)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전형적인 배치방식이다.
삼국유사에는 또 흥륜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석굴암편 참조)와 김현감호(金鉉感虎)가 대표적인 것이다.
신라 풍속에 매년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 서울 안 남녀들이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각과 탑을 돌며 복을 받는 모꼬지로 삼는다. 원성왕 시대에 화랑으로 김현이라는 사람이 있어 밤이 깊은데도 혼자 쉬지 않고 돌더니,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돌다가 서로 감정이 통하여 눈을 주게 되매 탑돌이를 마치고 그는 처녀를 끌고 으슥한 곳에 들어가 관계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고 하매 김현이 뒤를 따르니 처녀가 거절하는 것을 억지로 따라갔다.
서산 기슭에 와서 한 초막으로 들어가니 웬 노파가 있다가 처녀에게 묻기를, “따라온 사람이 누구냐?”고 하였다. 처녀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더니 노파가 말하기를,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없는 것만 못하구나! 그러나 저지른 일을 말린들 무엇하랴. 몰래 숨기기야 하겠지만 너의 형과 아우가 사나운 것이 염려된다”고 하고 낭을 안으로 들여 숨겨두었다.
조금 있다가 범 세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와서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집안에 누린대가 나니 요기하기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노파가 처녀와 함께 나무라기를, “네 코가 어떻게 되었구나!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였다.
이때에 하늘에서 소리를 쳐서 “너희들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 좋아함이 매우 심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해야 하겠다.!”고 하니 세 짐승이 듣고 모두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처녀가 말하기를, “세 오빠가 만일 멀리 피하여 자진하여 회개한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지요”라고 하니 모두 좋아서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치면서 달아났다.
처녀가 들어와 낭에게 말하기를, “처음에는 제가 당신이 저희 족속에서 욕스럽게 오시는 것이 부끄러웠으므로 못 오시게 거절하였지만 이제는 이미 감출 것이 없으매 감히 속에 먹은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설사 제가 서방님과 비록 유(類)는 다르나 하룻밤 즐거운 자리를 같이 했으니 그 의리는 돌띠맺음만큼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세 오빠들의 죄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여 온 가족이 당할 벌을 제가 당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서방님의 칼날 밑에 죽어서 덕을 갚는 것과 같겠나이까. 제가 내일 시내로 들어가 살상을 심하게 하면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을 것이요, 대왕은 반드시 높은 벼슬을 걸고 나를 잡을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당신은 겁내지 말고 나를 좇아 성 북쪽 숲속까지 오면 제가 거기에서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김현이 말하기를, “사람과 사람이 사귐은 인륜의 원칙이요 다른 종류와 사귄다는 것은 대체 정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이 잠잠하게 되었으매 참으로 천행이라고 할 것인데 어찌 차마 제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한때의 벼슬을 행으로 구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처녀가 말하기를, “낭군은 그런 말을 마소서. 오늘 저의 목숨이 짧은 것은 바로 천명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족속의 행복이요, 자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서 다섯 가지 이득이 갖추어지니 어찌 이를 어기겠사오리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진리를 강설하여 좋은 과보를 장만해주시면 낭군의 은혜는 더할 수 없이 클 것이외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서로 울며 작별하였다.
이튿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 심하게 날뛰어 감당할 수 없었다. 원성왕이 이 말을 듣고 명령하기를, “범을 잡는 자는 2급 벼슬을 주리라!”고 하니 김현이 대궐로 들어가 아뢰되, “소신이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매 곧 벼슬을 먼저 주어 그를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갔더니 범이 처녀로 변하여 반가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간밤에 낭군과 함께 진심을 털어놓고 하던 말을 낭군은 소흘히 마소서. 오늘 내 손톱에 할퀴어 상한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는 곧 김현의 칼을 뽑아서 제 손으로 목을 찌르고 엎어지니 바로 범이었다.
김현이 숲에서 나와 소리쳐 말하기를, “지금 여기에서 범을 대번에 잡았다”고 한 다음, 사정은 누설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상한 사람들을 치료하니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도 세간에서는 이 방법을 쓰고 있다.
김현이 이미 등용되매 서천(西川) 가에 절을 세워 이름을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언제나 「범망경(梵網經)」을 강설하여 범의 명복을 빌며 역시 몸을 희생하여 자기를 성공하게 한 은혜를 갚았다. 김현이 죽을 때에 이르러 이전에 당한 이상한 사적에 감동하여 그대로 적어 기록을 만드니 에상에서는 처음으로 들어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 기록을 「논호림(論虎林)」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일컬어온다.
<삼국유사 김현감호(金鉉感虎)조>
오늘날의 문학연구자들에게 우리소설이 언제 시작하였는가를 밝히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체적으로 고소설의 시작은 15세기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로 잡고 있다. 그런데 소설이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격식을 갖춘 소설이라면 그와 비슷한 작품을 좀더 이른 시기에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김현감호』는 그대로 하나의 소설적 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기이한 이야기가 소설로 발전하는 고대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일연스님이 소설의 구조를 알고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작품의 구조로 보아 금오신화에 이르러 완숙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우리 소설이 거치는 발전과정상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설화 중에는 일연이 소설적 서사전개에 가까이 갔음을 확인해 주는 부분이 있다. 남백월의 두성인, 낙산사의 두 성인, 포산의 두 성인, 혜숙과 혜공, 광덕과 엄장 같은 경우가 그렇다. 삼국유사의 설화들에서는 서사문학의 갈등구조, 국면전환, 인물형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의 설화들을 소설이라 규정짓자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흥륜사에는 아도화상비(阿道和尙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흥륜사에 있었던 대형 돌물확(石槽)이 전한다. 그러나 흥륜사는 고려시대인 1238년에 있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린다. 그리고 고려 고종 31년(1244)에 중창으로 이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폐사되어 김시습의 시문(詩文) 등에는 보리밭과 민가로 변해버린 황량한 모습만 전하고 있다.
*흥륜사터 초석(경주공고)
*흥륜사터 초석
*흥륜사터 장대석
*흥륜사터 장대석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장대석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등하대석
*흥륜사터 석등하대석
*흥륜사터 석등 복련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흥륜사터 석재
<2007.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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