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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암

蔥叟 2006. 11. 28. 08:25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금당암은 동화사의 별원으로 동화사의 동쪽 개울 건너에 있다. 금당암에는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이 정진하는 금당선원이 있어서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금당암에는 극락전과 동서 삼층석탑 그리고 수마제전이 있다. 일각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길게 축대가 있고 축대 너머로 극락전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금당암 일각문

 

*금당암 일각문

 

*금당암

  

*금당암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2년(숙조 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내부의 불단 위에는 중앙에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서 있는 모습으로 모셨다. 불상 위에는 대웅전처럼 머이 위쪽 천장을 장식하지 않고 대신 위쪽의 천장 높이와 모습을 다르게 하여 부처님의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건물 아래의 기단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양식이다. 빗물과 습기를 피하고 건물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바닥돌을 쌓고 그 위로 차례로 돌기둥과 넓적하게 깎은 돌과 건물을 고이는 돌로 마무리하여 기단을 샇은 것을 말한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극락전 전체의 분위기는 화려하거나 번잡스럽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단아하여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축대 아래쪽 정면 중앙에는 연화문이 양각된 방형 배례석이 놓여있는데 역시 9세기경 신라 양식의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극락전 자리가 동화사의 본절터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선원

 

*금당암 동삼층석탑

 

   극락전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동서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지만 두탑이 전각의 앞쪽에 놓이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극락전의양 옆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동탑은 대부분 뒤에 보강한 것으로 석재의 결구와 수법이 조화를 잃고 있다. 상층과 하층의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고 상층갑석에는 부연을 나타냈다. 탑신부에서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 층마다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옥신석에는 우주를 새겼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이다. 그리고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안화, 보륜, 보주가 남아 있다. 복발은 편구형이고 앙화에는 8화와 보륜에는 8엽의 연화가 있다.

 

*금당암 동삼층석탑

  

*금당암 동삼층석탑 상륜부

 

*석등

  

*석등 화사석

 

*상석 문양

 

*금당암 서삼층석탑

 

   서탑은 이중기단으로 산층과 하층에는 중석과 갑석을 갖추고 각면에 탱주를 새겼다. 탑신부는 동탑과 같이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고 옥신석에는 우주를 새겼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 만이 남아 있다.

 

   동서삼층석탑은 석재의 결구수법이 거의 같으며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경쾌한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속하는 미려한 석탑 중의 하나이다.

 

   조선말기에 허훈(許薰, 1836~1907)이 지은 금당탑기(金堂塔記)에 의하면 함통(咸通) 계미(癸未), 즉 신라 경문왕 3년(863)에 경문왕이 민애왕을 추복하기 위해 사리 7과를 봉안하여 석탑을 세웠는데 헌강왕 원년(873)에 삼강대사가 탑을 금당으로 이안했다고 한다.

 

   경문왕이 어째서 민애왕을 추복하기 위하여 이탑을 세웠을까? 여기에는 신라 왕족간에 벌어진 처절한 왕위 다툼이 빚어낸 곡절이 숨어 있다.

 

   42대 흥덕왕은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이 죽게 된다. 그러자 그 사촌 계열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김균정과 아들 김우징이 한편에 서고 김제융과 김명이 다른 편에 서게 되는데 이때 김양은 김균정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김균정이 화살에 맞아 죽고 김제융 편의 승리로 끝나고 김재융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43대 희강왕이다.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도망을 가고 김양은 서라벌에 남아 있다가 1년 후에 역시 청해진으로 피신하였다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는 조건하에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 서라벌에서는 희강왕을 죽이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44대 민애왕이다.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경주에 진격한 김우징은 민애왕의 정부군과 격전 끝에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45대 신무왕이다. 그러나 신무왕 역시 7개월만에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46대 문성왕이다.

 

   그러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려 하나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 해도인(海島人·섬사람)을 왕비로 책봉할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혀 결국 거절하게 되고 장보고의 군사력이 두려워 자객 염장을 장보고에게 보내 그를 살해하여 후환을 없애고 청해진도 폐쇄하기에 이른다. 그후 서해가 혼란해지면서 신라는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흥덕왕의 친형인 헌덕왕의 왕자였던 심지왕사가 진표율종의 승통을 계승하여 팔공산으로 돌아와 있을 때 그의 이모부였던 희강왕의 손자인 경문왕이 등극해 있었다. 민애왕은 경문왕 부친의 외숙이기도 하고 심지왕사의 외숙이기도 하며 희강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했다. 그 민애왕의 명복을 빌어줄 것을 심지왕사는 경문왕에게 청했던 것일까?

 

  

 

*금당암 서삼층석탑

  

*금당암 수마제전

 

   극락전의 뒤쪽에 수마제전(須摩提殿)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닌 작은 법당이 있다. '須摩提'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로 번역하면 극락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마제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극락전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앞면 1칸 옆면 1칸의 작은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속을 가지고 있는 우물천장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그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로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 중후기 다포양식의 소박한 기법과 짜임새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수마제전(須摩提殿) 편액

  

*수마제전 벽화

  

*수마제전 아미타여래좌상

 

 

 

<2006.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