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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蔥叟 2006. 11. 27. 08:13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계곡이 아름답고 산봉이 웅자하여 많은 사적을 품고 있는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 부악(夫岳)이었다. 신라 말에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 고려 태조 왕건이 5천의 군사로 백제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역습당하여 생명마저 위태로울 때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의 목숨을 살렸는데, 신숭겸을 비롯하여 김락 등 8명의 장수가 이 산에서 전사하여 팔공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처음 이 터에 절을 창건하였을 때는 유가사(瑜伽寺)라 했다가 832년 신라 헌덕왕의 셋째 왕자인 심지(心地)스님이 이 절을 중창할 때 겨울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가득해 동화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49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인데, 이때 법상종의 일파인 유가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므로 따라서 심지스님이 동화사의 사실상의 창건주일 것으로 추측된다.

 

*동화사 봉황문(일주문)

 

*팔공산동화사봉황문 편액

 

*동화사 안내도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심지스님의 이야기이다.

 

   중 심지는 진한(신라를 말함) 제 41대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지학지년(志學之年-학문에 뜻을 둔 15세) 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불도에 근면히 임했다. 중악(中岳-팔공산)에 가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속리산에 있는 심공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과정(果訂)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뜻을 세우고 찾아 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난 뒤여서 참례를 허락 받지 못하였다.

 

   이에 땅에 앉아 마당을 치면서 여러 무리들과 함께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하고 이상스러움을 보았다. 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사양하고 거짓 병을 핑계하고 방안으로 물러앉아 당을 향하여 조용히 예배 했다.

 

   그러자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이 일찍이 선계산에서 피를 흘리던 때와 같았다. 그리고 매일 지장보살이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자 산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보니 옷깃 사이에 두개의 간자가 끼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심공에게 아뢰니 영심이 말했다.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하고 검사해 보니 함은 그대로 봉해 있었다. 그러나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심히 이상히 여겨 간자를 다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또 옷깃 속에 있었다. 다시 돌아와 아뢰니 심공이 이렇게 말하며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심지가 간자를 받아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더니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게했다. 그는 바위 밑으로 내려가 엎드려서 삼가 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간자를 모시고자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 만으로 정할 일이 아니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쳐 보기로 하자." 하여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자, 간자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 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저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므로 앞길이 밝아지네.

   불골(佛) 간자를 구해 얻어서, 정결한 곳 찾아 정성 드려 바치네.


   노래부르기를 마치고 간자를 숲 속 샘에서 찾았다. 곧 그 곳에 당을 짓고 간자를 모셨는데, 지금의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삼국유사 심지계조>  

*봉황문 뒤의 폭포

 

*동화사 진입로

 

*당간지주

 

   동화사의 당간지주는 66cm의 간격을 두고 양 지주가 서 있다. 양 지주의 내면에는 조각이 없으나 외면은 양측 모를 죽이고 중심에 종으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지주의 내면 상단에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방형 간구를 마련하고 밑으로는 원공의 간공을 간춘 것이 특징이다. 전체의 형태가 견쾌한 맛은 없으나견실하고 장중한 인상을 주는 당간지주로 조성연대는 동화사 창건과 관련있는 통일신라  하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

 

*인악당

 

*인악대사비

 

*인악대사 비문

 

*귀부

 

*귀부 봉황머리

  

*석탑

 

*동화사 부도

 

   동화사 부도는 현재의 장소에서 약 1km 덜어진 도학동의 내학마을에 스러져 있던 것을 지금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높이는 172cm이며 바닥돌만 사각이고 그 위의 부재들은 모두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다. 밑받침돌과 중간받침돌은 팔각으로 별다른 장식조각이 없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윗받침돌은 연꽃 무늬로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몸돌괴임이 마련되어 몸돌을 받치고 있다. 몸체를 덮고 있는 지붕돌로 팔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목조건축의 요소를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도는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9세기에 정립된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부도

      

*해탈교

 

*봉서루

  

*봉서루

 

   봉서루(鳳栖樓)라는 독특한 이름의 문루인데 봉화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하였으니 오동꽃(桐華)이라는 절 이름과 잘 어우리는 이름일 뿐더러 봉황이 알을 품은 지세라는 이 절터에 잘 맞아 덜어지는 이름이다. 봉서루 밑으로 봉황의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도 있고 그 바위에 봉황의 알을 조각해 두었다. 봉서루는 임진왜란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하던 곳이기도 하다.

 

*봉서루

 

*봉서루 봉황새알

 

*봉서루 편액

 

*대웅전

  

*대웅전

 

*대웅전 원형계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과 옆면의 칸수가 같지만 얖면의 칸살이 더 넓어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대웅전 정면의 문짝은 활짝 핀 꽃잎을 채색으로 새긴 꽃살문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꽃살문짝은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 천정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주문의 편액에도 봉황문이란 이름을 붙이고 인안대사비의 귀부도 봉황으로 조각하였으며 봉서루라는 문루에다 대웅전에도 봉황을 조각하여 동화사는 봉황과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불단 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그 양쪽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대웅전 꽃창살

 

*대웅전 꽃창살

 

*대웅전 꽃창살

 

*대웅전 꽃창살

  

*요사채의 금강역사상

 

*대웅전 삼층석탑

 

*대웅전 삼층석탑 탑신부

 

*대웅전 삼층석탑 상륜뷰

 

*산신각

 

*조사전

 

*칠성각

  

*새로 조성한 통일기원 약사대불입상(높이 30m)

 

*약사대불과 석탑(높이 17m)

 

 

 

<2006.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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