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가락국 수로왕비릉
구지봉 동쪽에 있는 이 능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비릉이라고 전해오는 고분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후는 옛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영제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 왕후가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했다. 가락국기를 읽어보자.
건무 24년 무신(48)7월27일에 구간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람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왕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로 삼게함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 -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경기안에 있는 나라 - 에 가도록 했다. 문득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와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내 구간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배 안에 탔던)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라 수가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유사를 데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 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는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또 시종해 온 잉신(시집갈때 따라가는 시신)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보,조광이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정,모량이라고 했으며, 또 노비까지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20여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의 옷과 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이제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니 왕은 친히 나아가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많은 군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의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
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 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열리는 좋은 과일)를 찾고, 하늘로 가서 번도(3000년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 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조>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되어있지 않다. 능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다. 능의 전면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아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두줄로 새겨져 있다.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이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경내에 자연석 덩어리와 같은 상태로 남아있는 '파사석탑'의 파편이라고 전하는 석재가 있는데,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의 내용에 의하면, 허황후가 배를 타고 올 때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다음은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금관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시조 수로왕이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께 그 까닭을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때서야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댔다.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으며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 곳을 주포하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곳을 능현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으로 해안으로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이라 한다.
수로왕이 황후를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린 세월은 150여년이나 된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해동에는 아직 절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불법을 신봉함도 없었으니, 대개 상교(像敎-불교의 다른 이름)가 전해오지 않았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452)에 이르러 그 곳에 절을 세우고, 또한 왕후사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있다.
탑은 모난 사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하게 붉은 무늬가 있는데, 품질이 매우 좋으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 - 藥을 상중하 삼품으로 분류한 책)에 말한 -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나,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있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
파사석탑은 본래 김해시의 호계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절이 폐사되면서 이곳 수로왕비릉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마모가 심하여 탑의 형태를 알아보기도 어렵지만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해로 유입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석질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설도 있어서 궁금증을 더한다. 하지만 호계사가 조선후기에 중창되면서 절의 창건 연대를 소급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수로왕비릉 전경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파사각
*파사석탑
*파사석탑
<20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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