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낙남문화권

김해 대성동 고분군

蔥叟 2006. 10. 18. 08:44

김해 대성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은 김해를 중심으로 했던 금관가야의 지배계층의 무덤이 함께한 집단묘역이다. 마을에서는 무덤으로 덮힌 이곳 구릉을 '애구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무덤의 위치에 따라 그 시기가 다르다. 곧 2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무덤이 형성되었다. 특히 가야국의 지배계층 묘로 보이는 무덤에서 후한대의 중국계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 파형동기 등이 나와 한, 중, 일과의 문물교류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에서 1600년 동안 어둠에 묻혀있던 금관가야의 실체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멸망한 금관가야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는 1호분(5세기초)에서 순장된 유골과 남부지방에서 최초로 금동제 말안장, 금장 말꾸미개, 말투구 등이 출토됐다. 2호분에서는 10겹으로 쌓인 철정과 일본에서만 출토된다는 파형동기도 나왔다. 하지만 유물의 70~80%가 이미 도굴된 것으로 밝혀져 아쉬움도 컸다.

 

   3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29호분에서 남부지방 최초로 북방계 유물인 동복이 나왔다. 따라서 이 고분이 북방 세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묘광 길이만 무려 10m인 29호분에서 도질토기와 100개 이상의 판상철부 등이, 그리고 도굴갱(도굴꾼이 무덤안 물건 훔쳐낸 구멍)에선 부서진 금동관이 나왔다. 이에 따라 29호분을 금관가야 최초의 왕묘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발굴단장이던 신경철 경성대 박물관장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순장, 그리고 앞선 무덤을 파괴하고 겹쳐 무덤을 쓰는 묘제 양식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금관가야를 건설한 집단은 부여족이라는 대담한 학설을 펼치기도 했다. 서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족의 지배집단이 옥저로 피신한 후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史實)을 두고 신 교수는 "이들이 바다를 통해 김해로 건너와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주장은 우리나라 고대사학계와 고고학계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현재의 수로왕릉이 아니라 대성동고분군 29호분이 김수로왕의 묘"라고 단정하는 학자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경성대 박물관 김재우 학예사는 "29호분이 금관가야의 출현을 알려주는 최초의 왕묘라면 1호분(5세기 초)은 금관가야의 종말을 알려주는 최후의 왕묘"라고 설명한다. 13호, 2호, 3호분 등이 그 사이의 왕묘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4세기 초(1/4반기) 왕묘가 아직 확인이 안되고 있다. 지금도 대성동고분군 관련 학술 세미나가 열리면 학자들은 '금관가야는 부여족이 세웠다'는 신교수의 가설에 대하여 치열한 찬반 양론을 거듭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대성동 1~4호분

 

*대성동 1~4호분

 

*대성동 1~4호분

 

*대성동 5~22호분

 

*대성동 5~22호분

 

*대성동 5~22호분

 

*대성동 5~22호분

 

*대성동 23~24호분

 

*대성동 23~44호분

 

*동경

 

*쇠뿔손잡이항아리

  

*화로모양토기(3호분)

 

*바리형그릇받침(1호분)

 

*긴목항아리(1호분) 

  

*중국북방계청동솥(동복) 

 

*쇠뿔손잡이굽항아리

 

*쇠뿔손잡이굽항아리

 

 

 

<20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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