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가락국 수로왕릉
이 능은 오래 전부터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능으로 전해져왔다.봉분은 원형봉토분이며 능의 규모는 직경 22~23m, 높이 5m이다. 왕릉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납릉정문, 문무인석, 가락루, 홍살문 등의 부속건물과 석물이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에 의하면 대궐의 동북쪽에 능묘를 지었으며, 높이 일장, 주위 삼백장으로 그곳에 장사지내고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한다.
이 능의 내주구조는 지봉유설의 기사에 따르면 규모가 큰 석실묘로 추정된다. A.D. 1세기에서 3세기 사이가 되고, 이 시기가 문화단계로 볼 때 본격적인 고총고분기 이전의 단계여서 이 능이 대형 목곽묘일 가능성도 있으나, 이보다 앞선 단계로 근년에 발굴된 창원 덕산리 지석묘의 하부구조를 참작한다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이 높다. 능역내에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2기가 있고, 가까이에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대성동 고분군 등이 있어 가락문화의 중심지 평지에 위치한 고분이다.
사료가 부족하여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가야의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히 적고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수로왕의 탄생과 가야의 건국이야기는 이러하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등 아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는데 모두 1백호로 7만5천명이었다.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A.C.42) 3월 계욕일(액땜을 하는 날로 목욕을 하고, 물가에서 술을 마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 산봉우리의 이름)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 3백명이 그 곳에 모였는데 사람 소리와 같기도 하지만 그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만 들려왔다.
"이 곳에 누가 있는가?' 구간(九干)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지(龜旨)입니다." 이에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므로, 이를 위하여 여기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뿌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뛰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너희들은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후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한 줄기 자주색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끝을 찾아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다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걸상 위에 놓아 두고 무리는 제각기 흩어졌다가하루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셔 그 합을 열자, 여섯개의 알은 화하여 아기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했으며 이내 평상 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더니 10여일을 지나자 키가 9척으로 은나라 천을(天乙-은나라 탕왕)과 같고, 얼굴이 용안임은 하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거나 혹은 수릉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가서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가야는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였는데, 질박하고 검소할 따름이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겨우 3척이 었다.
즉위한 2년 계묘(A.B. 43)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이 남쪽 신답평에 나가서 사방의 산악을 두루 바라보다가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 땅은 여뀌잎처럼 협소하기는 하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살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므로 칠성(七聖, 성이란 진리를 깨친사람 이라는 뜻)이 살 곳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듦이 어떻겠느냐?"
이에 1500보 둘레의 외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 공장들을 불러 모아서 그 달 20일에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궁궐과 옥사(屋舍) 만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하여 갑진(44) 2월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겨가서 모든 정사를 다스리며 서무에도 부지런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조>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이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시화의 가진 이주민과 난생신화를 가진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성립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수로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 순탄하게 왕위를 누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지만 특유의 비범함으로 이를 물리쳤던 것이다. 수로왕의 능력이 비범함을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한다. 수로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으려던 탈해가 수로왕에게 패하여 사로국으로 쫓겨간 이야기다.
홀연히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므로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는데 이름을 탈해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는 3척이요,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혼연히 대궐로 나아가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이에 왕이 대답햇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함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 하게 하려 함이다. 나는 감히 천명을 어기고 왕위를 너에게 줄 수 없으며, 또한 이 백 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보자."
이에 왕이 승낙하였다. 순간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자,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가 또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변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탈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또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술법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서,참새가 새매에게서 잡히기를 면한것은 대저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실로 어렵겠습니다."
탈해는 곧 왕께 하직하고 교외에 나가 가까운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닿는 수로로 해서 떠났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백척을 보내어 쫓게 했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이내 돌아왔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조>
*수로왕릉 안내도
*홍살문
*가락루
*가락루 편액
*시생대
춘추대제시 생성례(牲省禮)를 행하는 곳
*납릉정문
*납릉정문 편액
*납릉정문의 신어상(神魚像)
*신어상
*납릉(수로왕릉)
*수로왕릉
*수로왕릉 능비
駕洛國首露王陵
*석양
*석양
*문인석 무인석
*문인석 무인석
*신도비
*신도비 이수
*신도비의 태양문양
*숭선전
가락국 시조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안향각
춘추대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곳
*숭안전
제2대 道王, 3대 成王, 4대 德王, 5대 明王, 6대 神王, 7대 惠王, 8대 莊王, 9대 肅王 및 왕비의 위패를 봉안해 놓은 전각
*전사청
춘추대제시 제수를 만들거나 보관하는 곳
*숭신각
*숭선비
*숭선비 제액
*비받침돌
*납릉원내의 고인돌
*고인돌
*고인돌의 성혈(性穴)
<20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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