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장항리절터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를 답사한다는 것은 먼저 신라 천년의 역사적 사실들을 문헌이 아닌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편린이나마 읽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현대적 의미로서, 영광을 누리던 한 시대가 역사의 운명 속에서 생명을 잃고 침몰할 경우 그들이 남겼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물들이 후손들과 외부의 적에 의해 어떻게 유린되는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렇다 우리는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안압지와 첨성대에서, 황룡사와 천마총 등에서 뿌듯하게 느끼는 민족문화의 자긍심의 이면에는 통일신라의 고려 귀속 이후부터 버려지고 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가릴 것 없이 우리라는 공동체는 빈곤한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체험의 장이 되는 것이다.
토함산 동록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위치한 장항리 절터. 토함산 순환도로가 개통되어 석굴암을 통하여 갈 수도 있고 덕동댐을 돌아 갈 수도 있다.
장항리 절터는 민족의 문화재가 유린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석과 장대석, 그리고 불상의 대좌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금당터 대좌 위의 부처님은 멀리 떨어진 박물관 정원에 중상을 입은 체로 입원해 계신다. 몸돌이 박살난 채로 지붕돌만을 겨우 맞춰놓은 동오층석탑의 모습, 그나마 서오층석탑만이 불완전하나마 옛 모습을 지켜주고 있어 한 가닥 다행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오층석탑의 모습이나 1층몸돌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이나, 박물관 정원에 모셔진 금당의 부처님은 통일신라 최 전성기의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걸작중의 걸작이다. 사실적 이상주의의 완성 작으로 일컬어지는 석굴암 본존불에 필적할만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오층석탑은 나원리 오층석탑과 함께 경주에서는 두 기밖에 없는 소중한 석탑이며, 1층몸돌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환조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후 몸돌에 부조로 조각 된 최초의 작품이다. 장항리 석탑 이후부터 신라의 석탑에 인왕상·사천왕상·십이지신상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은 5층탑이라는 데 있다. 본래 삼국시대에는 다층목탑이 세워졌다. 사천왕사 망덕사 모두 목탑으로 다층탑이었다. 그러나 감은사탑에서 삼층탑이 나타난 후부터는 서서히 다층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항리 탑이 세워질 때까지는 다층탑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층 몸돌에는 또 금강역사상 이외에도 쌍바라지문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보경사 금당탑의 자물쇠로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인왕상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서탑의 금강역사는 무장(武裝)한 모습인데 비하여 동탑의 그것은 평복(平服)을 입었다. 이는 불국사의 석가탑·다보탑 이후 서로 다른 조각으로 대칭을 이루려는 뛰어난 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금당터에 남아있는 불상대좌를 보면 복련(伏蓮)의 상대석 아래에 중대석이 있는데 이중대석에 8면을 돌아가면서 사자를 비롯한 신수상(神獸像)이 새겨져 있다. 8세기초 칠불암 조각에는 복련과 앙련으로 대좌를 장식하고 중대석은 두지 않았었다. 팔각의 중대석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석굴암 본존불 조각에서부터였다. 그후 장항리 대좌에서는 불상 중대석에 조각이 나타나는 최초의 작품이다. 장항리 이후 합천 영암사, 남산의 삿갓골 여래입상 등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중대석을 볼 수 있다. 즉 장항리 절터의 조각은 한국불교미술에서 중대석 조각의 출발점이요, 석탑에 조각이 나타나는 출발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당의 초석 사이에 장대석이 나타나는 최초의 예를 이곳에서 볼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장항리 절터의 의의는 크다 하겠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국사의 건축기법이 통일신라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장항리 절터 금당이 구조도 불국사에서 그 출발점을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불국사에서는 현재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에 장항리 절터가 최초의 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금당의 불상 대좌는 금당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러한 양식은 금당이 예배의 장소이지 설법의 장소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중이 모여 설법하는 곳으로 강당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임진왜란까지 이어져 오다 임진왜란 후에 불상이 점점 뒷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금당의 부처님이 뒷벽으로 밀려난 후에는 금당에서 설법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강당의 기능도 함께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의 절에 강당이 사라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도 장항리 절터를 비롯하여 신광의 법광사터 등에서 금당의 한가운데에 놓인 불상 대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절터를 지탱하던 축대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리던 것을 지금은 돌 축대로 쌓아 올려 그나마 더 이상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절터를 떠나면서 환희심과 쓸쓸함이 함께 감돌았다.
*장항리 계곡
*장항리 계곡 무지개 다리
*장항리 계곡
*장항리 절터
*장항리 절터
*장항리 절터
*장항리 여근곡
*장항리 여근곡
*장항리 서오층석탑
*장항리 서오층석탑
*장항리 서탑 인왕상
*장항리 서탑 인왕상
*장항리 서탑 인왕상
*장항리 서탑 인왕상
*장항리 동탑 인왕상
*장항리 동탑 인왕상
*장항리 동탑 인왕상
*장항리 동탑 인왕상
<2006.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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