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영지 석조여래좌상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남편 일이 하루빨리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나오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전설이다. 이곳에는 최근에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에서 가까운 곳에 마모가 심한 석조여래 조상이 있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이 현진건의 역사소설 '무영탑'에 나오는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영지와 아사달이 아사녀를 생각하며 다듬었던 석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쳤던 영지는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앞의 구품연지(九品蓮池)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 영지는 조선 후기 내지 일제시대에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석조여래좌상이 팔각의 중대석과 복련 하대석 그리고 앙련 상대석이 있는 연화대좌 위에 앉으신 것으로 보아 석굴암이 만들어진 직후인 8세기 말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800년 이후의 연화대좌에는 중대석에 호법신이나 보살상 등의 조각이 나타난다.
이 불상에는 스케일이 크고 볼륨감도 남아 있어 700년대의 조각기법이 조금씩 엿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은 다소 약화되었고 광배 등에서 무늬가 약화된 느낌을 주므로 시대는 다소 뒤떨어짐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며 특히 얼굴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지역민들의 얘기로는 6.25 당시에 이 불상을 표적으로 삼아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부분에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도 발견되는데 그 자손들이 이유 없이 병을 앓는 등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쨌든 이 석불은 아사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일 따름이다. 일부에서는 얼굴부분이 많이 튀어나와 있어 미완성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영지 석조여래좌상
*영지 석조여래좌상
*영지 석조여래좌상
*하대석
*하대석 복련
*중대석 안상
*상대석 앙련
*하반신 의문
*상호
*상호
*여래좌상 뒷면
*토함산에서 본 영지
*영지
*영지
*영지
*영지
<2006.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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