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
신라시대에 천문을 관측하던 대(臺)이다. 첨성대가 있는 곳을 속칭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첨성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유사에 점성대(占星臺)는 선덕여왕 때에 만들었다는 것과 내물왕릉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두 가지뿐이다. 그 동안 첨성대의 구조와 용도에 대하여 수많은 이설들이 있었다. 27단의 돌은 선덕여왕의 재위연대를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27단까지의 돌이 음력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등이다.
첨성대의 기본구조는 401개의 돌을 이용하여 27단의 돌 한가운데에 3단 높이의 출입구를 만들고 아래로부터 13단까지 흙을 채우고 그 위에 사다리를 놓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판석 위에서 별을 관측하도록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별을 바라보던 곳이라는 뜻의 첨성대(瞻星臺)로, 삼국유사에는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라는 의미의 점성대(占星臺)로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는 70~80년대 중반까지 그 용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던 유적인데 자연과학자들은 대체로 천문관측소라는 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던 중 불교의 수미산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즉 첨성대는 불교의 수미산을 형상화하여 불교재단 또는 기념물이라는 것인데 그 근거로는 천문관측기구가 평지에 있으며, 올라가는 구조가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천문관측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대의 정치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고대에는 천관(天官), 해관(海官), 일관(日官)들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징후들, 즉 일식, 월식, 태풍, 서리, 혜성활동 등을 관측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정치적 자문을 하였는데 이러한 천문관측기구가 왕성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정치적 자문이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천문대가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것은 야간의 불빛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높은 곳이 필요해서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60년대에 홍사준은 삼국시대의 신라는 첨성대와 같은 뛰어난 석조건조물을 만들 능력이 없었고 백제 건축가인 아비지(아비지)가 황룡사를 건조한 후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비지가 목석지공(木石之공)이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첨성대가 이루는 선은 부드러우면서 직선으로 내려오다 곡선을 이루는데 이러한 완만한 곡선문화가 고신라에는 없었고 백제의 문화가 유입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다. 백제의 미륵사와 신라의 황룡사도 문물교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황룡사의 돌은 잘 다듬지 않고 자연석에 가까우나 미륵사는 정확히 다듬어 사용한 것이 보인다. 고신라의 절터를 보아도 일탑삼금당의 고구려식과 일탑일금당의 백제식이 섞여서 나타나지만 통일 후에는 고구려식과 백제식을 융합하여 쌍탑일금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첨성대
*첨성대
*첨성대 기단부
*정(井)자석
*정자석
*정자석
*첨성대 창구(窓口)
*첨성대 창구
*창구 아래 사다리 걸쳤던 흔적
*원통부의 석재
*팔뚝돌
*첨성대
<200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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