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재매정터(財買井址)

蔥叟 2006. 6. 10. 06:52

경주 재매정터(財買井址)

 

   신라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간단한 기록들이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엔 구지택, 겨울엔 가이택에서 놀았는데 이를 사절유택이라 일렀다. 제 49대 헌강왕 때에 성 안에 초가로 된 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 있었다. 노래소리와 피리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삼국유사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조>

 

   이 기록과 함께 삼국유사에는 신라시대의 호화주택에 관한 기록이 간단히 나와 있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서울에 17만 8천 9백 36호, 1360방, 55리, 서른 다섯개의 금입택(金入宅 - 부유한 큰 집)이 있었다. 이는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김유신공의 조상집),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김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이었다.

 

<삼국유사 진한(辰韓)조> 

 

   금입택은 말그대로 금들이택으로서 '1년 내내 진골귀족의 대저택에 황금이 들어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신당서 신라전에 '신라의 재상들은 1년 내내 녹(봉)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전하는데, 그들의 전장에서 수확된 곡물이 1년 내내 그들의 집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귀족의 대저택을 황금나락이 들어가는 저택, 즉 금입택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금입택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유신의 종가로 전해지는 재매정택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35금입택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대략을 모습들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재매정택(財買井宅), 천택(泉宅), 정상택(井上宅), 지택(池宅), 지상택(池上宅)등은 우물이나 연못과 관계가 깊은 부잣집일 것이다. 

  

   둘째, 남유택(南維宅,반향사 아래쪽방), 빈지택(賓支宅, 반향사 북쪽), 한기택(漢岐宅, 법류사 남쪽), 비혈택(鼻穴宅, 법류사 남쪽), 판적택(板積宅, 분황사 위쪽 방), 김양종택(金楊宗宅, 양관사 남쪽), 사하택(寺下宅), 사상택(寺上宅) 등은 특정 사찰부근에, 아남택(衙南宅)은 관아남쪽에 있는 집이다.

 

   셋째, 장사택(長沙宅), 곡수택(曲水宅), 교남택(橋南宅), 양상택(楊上宅), 유야택(柳也宅), 누상택(樓上宅)은 모두 백사장이나 강물, 다리, 버드나무, 누각 등과 관련되어 강가에 자리잡은 집이다.

 

   넷째, 양상택(楊上宅), 유야택(柳也宅), 누상택(樓上宅)은 집에다 버드나무를 심고 누각을 세웠고, 지택(池宅),지상택(池上宅)은 정원에 연못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앵택(上櫻宅)과 하앵택(下櫻宅)에는 앵두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재매정택은 김유신의 집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재재정에서 일어났던 김유신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유신이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이었다. 백제병이 다시 출동하여 국경에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했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비하기 바란다."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그 때 유신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은 문을 지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1 김유신전(상)>

 

   또한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와 유신의 동생 문희사이에 벌어진 로맨스도 재미있게 전한다.

 

   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서울에 가득찼다. 다음날 그 꿈 얘기를 문희에게 했더니 문희가 듣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하였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 하였다.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하니 언니가 "그래" 하며 승낙을 하였다. 문희가 치마폭을 벌리고 꿈을 받을 때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의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문희는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이 때 유신이 짐짓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고 하니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에게 봉침(奉針)을 하라고 하니 아해는

 

   "어찌 사소한 일을 해서 가벼이 귀공자와 가깝게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사양하였다. 이에 아지에게 명하였다. 공이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문희와 관계하였는데,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를하였다. 유신이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기를 "네가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하고서는 온 나라에 말을 퍼뜨려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거동을 한 틈을 타서 뜰에 나무를 가득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
기가 일어났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연기가 나는 까닭을 묻자 좌우에서 시중하는 신하들이 아뢰기를 "유신이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이는가 봅니다."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하엿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고 물었다.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했다. "그것은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 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후 떳떳이 혼례를 올렸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

 

*재매정

 

*재매정 비각

 

*재매정 비각

 

*재매정

 

*재매정비

 

*재매정에서 출토된 섲재들

 

*석재

 

*재매정 건물지 초석군

 

 

<2006. 5. 22>

 

  

 

 

*우물 외양 

 

 *우물 외양 

  

*우물 외양 

 

*우물내부 

 

*우물내부 

 

*우물내부 

 

*건물터 초석군 

 

*건물터 초석군 

 

*건물터 초석군 

 

*건물초석군 

 

*비각 돌기둥 

 

*재매정비 

 

*비문

 

 

 

<2006.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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