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전내물왕릉
경주지역을 공부해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역사를 복원하게 되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경주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신라의 역사가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기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왕릉과 절터가 특히 심하게 왜곡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내물왕릉이다.
내물왕은 사로국(斯盧國)을 건설한 후 4∼500년간 계속된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고 신라를 고대국가로 들어서는 기틀을 다지고 김씨 세습왕조를 연 임금이다. 이제 문헌기록과 왕릉의 양식 분석을 통하여 진실에 접근해보자.
먼저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릉은 법흥왕 이후에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다만 오릉, 석탈해왕릉, 미추왕릉만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박, 석, 김씨의 시조릉에 관한 기록만이 등장한다는 것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추가 기록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 능에 대한 기록도 그 정확성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기록일 뿐인 것이다. 현재의 능은 삼국유사의 「내물왕릉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는 기록에 의해 지정되었을 뿐이다.
조선전기까지의 기록에도 12기의 왕릉이 전해오는데 내물왕릉에 관한 기록은 없다. 또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일제시대에 들면서 근대학문이 도입되고 역사학적으로 독일사학이 소개되면서 그 영향이 최남선, 정인보, 박은식 등 사학자들에게 미치면서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기술되었고 삼국유사는 자주적 사관(史觀)에 의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타고 지정된 능이 바로 전내물왕릉인 것이다.
다음으로 무덤의 양식을
분석해보자. 내물왕릉은 높이가 약7m로, 적석목곽분인 천마총이 약 13m,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은 약 22m에 비하면 작은 규모에
속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석실분은 법흥왕 이후인 AD500년 이후에나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봉분 주위에 자연석의 호석이 둘러져 있는데, 호석이 등장하는 것도 6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4세기 중반의 내물왕릉은 적석목곽분이지 호석을 두른 석실분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유물과 기록이 서로 상충할 때에는 유물이 기록에 우선한다. 기록은 왜곡과 날조가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전내물왕릉은 문헌기록상으로나 무덤의 양식으로나 내물왕의 무덤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진짜 내물왕릉은
어느 것인가? 먼저 황남대총을 들 수 있다. 황남대총은 현재까지 발굴된 적석목곽분 가운데에서 가장 고식(古式)의 고분이기 때문에 내물왕릉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적석목곽분이 모두 발굴된다면 더 고식의 고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고식이기 때문에 내물왕릉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 이 견해는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구분된다」는 견해를 전재로 하는 것인데 현재까지 여섯 기의 적석목곽분을 발굴하여 5개의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꼭 왕이 아니라도 대형의 적석목곽분을 만들고 금관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화백회의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은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권력이 분산된 상황에서는 누구나 대형고분을 축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여성이 묻힌 북분에서는 금관이, 남성이 묻힌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자의 신분이 남자보다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왕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내물왕릉은 결코 아니라고 보여진다.
두 번째로 119호분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적석목곽분이면서 봉분이 커서 호화분묘일 가능성이 높고 또한 첨성대의 서남쪽에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하지만 내물왕릉은 적석목곽분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대릉원 안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릉원이나 노동·노서동 고분은 밀집하여
분포하지만 119호분 주변의 고분은 밀집도에서도 분산되어 있고 규모도 작아서 축조시기가 늦음을 의미한다.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
*전내물왕릉의 호석. 이같은 양식은 무열왕릉 이후에 나타난다.
*전내물왕릉
<2006.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