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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팔공산 거조암

蔥叟 2006. 5. 19. 08:17

영천 팔공산 거조암

 

   거조암(居祖庵)은 말 그대로 큰스님이 계시는 암자라는 뜻이다. 거조암 영산전에는 526분의 나한이 계신다. 526분이나 되는 많은 조각을 모셨음에도 한 분도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 분이 없다. 기림사 천불전에 모셔진 1천분의 부처님의 모습이 기계로 깎아 똑같은 모습을 볼 때와는 달리 하나하나를 모든 정성을 들여 깎은 그 종교적 열정과 공력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거조암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펼쳤던 정혜결사(靜慧結社)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후 승안(承安) 5년(1200년)에 ‘정혜결사’는 이곳 팔공산 거조암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 중심도량이었다.

결사(結社)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공동체운동, 종교운동이다. 정혜결사는 개경 중심의 보수화되고 타락하여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이자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이었다. 지눌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그는 결사를 시작하면서 그 취지를 밝힌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통해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과 교로 나뉘고, 정과 혜로 갈려 그 두 가지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수행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와 분열을 일삼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자 그 혁신을 위한 실천이기도 했다.

지눌의 수선사(修禪寺, 지금의 송광사)가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던 반면 백련사(白蓮寺)에서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救生)에 전념했고 염불선을 수행의 방편으로 했다. 이는 교화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선사가 어느 정도 높은 근기(根機)를 가진 중생을 대상으로 했다면, 백련사는 ‘근기가 낮고 업장(業障)이 두꺼워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범부’를 대상으로 좀더 대중적인 면이 강했다.

 

*연등이 내걸린 거조암

 

*연등이 내걸린 거조암

 

*거조암 영산전

 

영산전은 우리 나라에 몇 남아있지 않은 고려시대 건물이다. 현재 국내의 고려시대 건물은 모두 6개가 남아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그리고 거조암 영산전이 남아있고, 북한에 2개가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거조암 영산전과 부석사 조사당, 그리고 봉정사 극락전이 같은 양식의 건물이며, 수덕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이지만 문의 구조가 다르며, 부석사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이며 강릉 객사문은 사찰건물이 아닌 행정관서의 출입문이다.

영산전은 주심포집의 맞배지붕으로서 간결하고 장중한 맛을 느끼게 한다. 조선 전기까지는 이러한 양식의 건물이 이어졌다. 다포양식은 대부분 이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또한 영산전의 구조는 정면 일곱칸 측면 세칸의 긴 경판을 보관하는 판고(板庫)같은 건물이다. 건물내부에는 단청이 없고 토벽(土壁)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사방에 배치된 작은 광창으로 최소한의 빛만 들어오고 있다. 즉 매우 간결한 내부구조인 것이다. 내부를 화려하게 벽화로 치장하게 되는 것은 빛이 들어가는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라고 한다. 또한 조선전기부터 천장이 만들어져 서까래를 가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침입 때에도 화를 입지 않고 우리 주변에 고려시대의 건물을 볼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닌 것이다.

 

*거조암 영산전

 

*영산전 편액

 

영산전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그리고 영산회상도가 후불벽화(後佛壁畵)로 봉안되어있다. 그 중에서 오백나한상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나한들의 표정이 모두 달라서 예술성이 뛰어나고 해학적인 작품들이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은 이 나한상에 대하여 영산전 건물, 후불벽화와 함께 거조암 삼보(三寶)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찬하고 있다.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천태만상은 인간의 희로애락의 대합창이다. 만듦새는 심히 유머러스한데 어떤 것은 크게 웃으며 혹은 분노하고, 혹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며 혹은 명상하며… 얼굴표정과 자세가 모두 다르다. 오백나한도를 조각으로 옮긴 것이다. 오백나한 하나 하나를 보아 가는 동안 나는 점점 가슴이 뿌듯하게 차 오르는 기쁨을 가눌 길 없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이들 나한상은 어느 무심한 범인이 칠한 것이건만 조각솜씨와 그림솜씨가 딱 어울려 희한하기 짝이 없어 미소를 자아내게 하며, 한편 그 모두를 조각한 준엄함에 엄숙해지기도 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ahan) 줄인 말이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자(尊者)라는 뜻에서 응공(應供)이라 풀어 말한다. 번뇌를 끊고 더 이상 생사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성자로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자이므로 진리에 상응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 풀어 말하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영산전 내부에 사진 촬영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사찰을 홍보하는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해봤지만 절대로 불가하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거조암 삼층석탑

 

영산전 앞에는 작은 탑이 하나 서 있는데 건물에 비해 매우 작은 탑이다. 규모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보이는데 상하층 기단의 갑석에 모두 경사가 나 있으며 층급받침에서 낙수면 끝까지의 간격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인도와 중국 및 삼국시대에는 탑이 절의 중심이었고 탑이 금당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국사 창건을 기점으로 하여 점차 탑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탑의 가치가 줄어들고 금당의 가치가 커졌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시대에서 통일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탑이 금당을 압도하는 규모로 지어졌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말할 것도 없고 쌍탑으로 건립되었던 사천왕사나 망덕사의 목탑도 금당의 규모를 압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석탑인 감은사탑도 금당을 압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탑이 규모는 금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불국사에 이르면 다보탑과 석가탑의 쌍탑이 금당과 5대5의 비율로 균형을 이루었고 그 후로는 탑의 규모가 더욱 왜소해져 오히려 금당이 탑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의 건물의 규모 면에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만큼 탑의 가치보다는 금당의 가치가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형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아니 형식이 변화된 이면에는 내용상의 변화에 근거한 것이리라.

 

 

<2006.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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