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중원서원문화권

단양 향교

蔥叟 2018. 10. 4. 12:37

단양 향교

 

단양향교는 조선초 태종 때인 1415년 처음 세워졌으며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명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위쪽에 제향공간을, 아래쪽에 강학공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제향공간은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다. 강학공간은 서쪽에 강당인 명륜당을, 동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향교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며, 경사진 지형을 고려하여 지금과 같은 건물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단성면은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고갯길 중 영주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만나는 곳으로 원래 단양군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1980년대 충주댐 건설로 남한강 주변이 수몰되면서 읍 소재지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주변에는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이 거주하며 살았던 단양 수양개 유적이 있으며,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인 단양 적성비가 있는 적성산성이 있다.

단양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에게 제사를 드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단양에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초기 ‘일읍일교(一邑一校)’원칙에 따라 태종16년(1416) 단양 군수 이작이 창건하였다. 명종 때 단양군수 이황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황준량이 1557~1558년에 걸쳐 옮겨 짓고, 명륜당을 고쳐지었다. 이후 영조 때에 두 차례 낡은 부분을 손질하였으며, 정조 때에는 명륜당을 고쳐지었다. 1971년과 1977년에는 낡은 부분을 손질하여 고쳤다. 단양향교는 앞에 강학공간을 두고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풍화루(風化樓)를 지나 향교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유생이 거처하며 글을 읽던 동재가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단양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물던 고직사도 현재까지 남아 있다. 단양향교는 조선시대 때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갑오개혁(1984) 이후에 근대교육이 실시되면서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봄 가을 2차례에 걸쳐 문묘제향을 실시하고 있다.


단양향교 출입문인 풍화루는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문루이다. 영남지방에서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고, 퇴계 이황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풍화루는 공부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손님들이 잠시 쉬면서 남한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풍화루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옛 단양군 읍치와 남한강 풍경. 여행객들인 단양군 읍치에서 쉬었다가 청풍도호부와 충주를 거쳐 서울로 향했다. 단양향교는 경사진 지형 때문에 문루와 강당, 대성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강당인 명륜당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강당은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바깥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옆면에도 벽이 없이 문을 달아 놓았다.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풍화루

 

▲단양향교 내삼문

 

▲단양향교 내삼문

 

▲단양향교 대성전

 

 

 

<2018.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