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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장군 죽지랑의 탄생설화 - 단양 보국사터 석조여래입상

蔥叟 2018. 10. 3. 04:47

신라장군 죽지랑의 탄생설화 - 단양 보국사터 석조여래입상

 

보국사터(輔國寺址)는 죽령 마루에서 용부원리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가 우측 산기슭에 위치한다. 창건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사지에 전하는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과 조상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2(三國遺事 券2) 효소왕대(孝昭王代 692~702) 죽지랑 조(竹旨郞 條)에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竹旨嶺, 지금의 竹嶺)의 고갯길을 닦은 거사(居士)에 감응하여 그가 죽은 뒤 고갯마루 북쪽에 장사를 지낸 후 돌로 미륵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는 내용 역시 보국사지가 위치한 곳과 관련되어 불교문화의 유입을 시사한다.

 

○初, 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理所, 時三韓兵亂, 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至,旨>*<領,嶺>, 有一居士, 平理其領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理, 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 驚怪尤甚, 翌日使人問{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처음에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그의 임지로 부임하러 가려하는데, 이때에 삼한(三韓)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삼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길을 잘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매우 탄미하자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놀라운 것을 보고 존대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지 한달이 되었다.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하니 그 날이 꿈꾸었던 날과 같은지라,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라고 하였다.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嫗,軀>, 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 與庾信公爲副帥, 統三韓, 眞德/*大{太}宗/文武/神文, 四代爲冢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戶,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兒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是.”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불 한 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이유로 죽지라 이름 지었다. 이 죽지랑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진덕, 태종, 문무, 신문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삼국유사 孝昭王代 竹旨郞조>

 

태몽은 한결같이 장래에 비범한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죽지랑은 진덕,태종,문무,신문에 걸쳐 4대 재상을 지냈다. 죽지령에서 길을 닦던 거사가 몸에 들어오는 꿈으로 현몽한 죽지랑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예시된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꿈에서 큰 길을 닦는 것은 출세를 의미한다. 아울러 귀인을 만나 더 높이 승차하는 것을 말한다. 거사라 함은 중국에서는 학식과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유학에서 학문은 출세를 의미한다. 학문적 소양을 세상에 유익하게 사용함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성의 학문으로 전생의 거사는 다음 생에 입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지랑은 과거로부터 귀인으로 태어난 예지몽임을 말하고 있다. 홀로 험준한 고개에 길을 놓는다는 것은 '간난신고(艱難辛苦)'로서 죽지령을 평평하게 닦은 무명(無名) 거사의 이웃을 위하는 이타성이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 삼국통일)을 달성 한 저력을 말하는 것이다.

 

죽지랑은 화랑 출신으로 장군이 되어 649년 진덕여왕 때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파진찬을 거쳐 중시가 되어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 때 백제의 잔병 소탕전에 참전하였으며 이 해 문무왕이 즉위하자 귀당 총관이 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정벌 때 경정 총관으로 참전하였고, 671년 석성에서 당 군사와 싸워 적을 5천여 명이나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보국사터가 위치한 죽령(竹嶺)은 신라의 북진정책에 있어, 영남에서 원주와 한강 이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러한 중요 거점에 세워진 보국사지는 당시 교통과 관계되는 사찰로 충주시 상모면 미륵사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지표조사 시 발견된 원형석주(圓形石柱), 죽절형(竹節形), 석주(石柱) 벽석(壁石) 등은 미륵사지와 같은 석실구조를 보여주고있어 주목된다.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머리와 상체일부가 파손이 되었으나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의 길이는 4m로 죽령이북 유일한 장육불상이다. 상체의 파손으로 대의(大衣)의 착의방식은 알 수 없으나 양다리 위의 주름은 U자 모양의 타원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배 위로 올리고 있으며 왼손은 몸에 밀착하여 아래로 내려 대의 자락을 쥐고 있다. 이 불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과 같은 형식으로 보여주나 수인(手印)의 위치가 반대이며 양식상 다소 늦은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보국사터 석불 지대석

 

▲보국사터 석물

 

▲보국사터 석물

 

▲보국사터 석물

 

 

 

<201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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