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다솔사 안심료
安心寮, 竹爐之室
안심료(安心寮)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안심료 앞에는 측백나무 세 그루가 높다랗게 서있는데, 한용운 스님의 회갑 때 지인(知人)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황금측백 나무’라고 부른다. 만해 선생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그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이곳에서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최남선과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의견 충돌을 했는데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그의 초안은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었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
다솔사에 머물렀던 또 다른 유명 인사는 소설가 김동리(1913~95년)이다. 1935년 등단하여 ‘무녀도’ ‘황토기’ ‘역마’ 등에 이어 1961년 대표작 ‘등신불’을 발표한 아주 유명한 소설가이다. ‘등신불’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다솔사에서 만해 한용운을 만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동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1937년 가을인가, 이듬해 봄인가. 만해 한용운이 다솔사에 왔었다. 나는 10리 남짓 떨어진 원전마을 광명학원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솔사에서 차를 마실 때 만해가 무슨 얘기 끝에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 하고 물었다.” 동리는 ‘분신공양’ ‘소신공양’이란 말을 이 때 처음 듣고는 “아래턱이 달달 떨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명한 소설 ‘등신불’이 다솔사와 만해 한용운과 인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안심료 오른쪽에는
▲죽로지실
▲죽로지실
▲죽로지실
▲안심료
▲안심료
▲안심료
▲'방장산 다솔사' 현액
▲'줄로지실 편액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 선생 친식수
<2018.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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