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지리산문화권

사천 다솔사 어금혈봉표

蔥叟 2018. 8. 24. 06:06

사천 다솔사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다솔사(多率寺)라고 하는데, 천년고찰임을 입증이라도 해줄 듯이 초입부터 울창한 장송(長松)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 오솔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오른쪽 길가의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고종(高宗) 22년에 쓴 비명이 새겨져 있다. "御禁穴封表"란 커다란 글씨와 "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이란 작은 글씨이다. "御禁穴封表(어금혈봉표)"란 어명(御命)으로 다솔사 경내에 무덤(墓)을 쓰는 것을 금(禁)한다는 뜻의 표지석이다. 그리고 "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광서11년을유구월일)"에서 광서(光緖)는 청나라 연호로 '광서 11년을유9월'은 고종 22년 9월(1885년, 을유년)을 뜻한다.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여흥 민씨(驪興 閔氏)들이 살해당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에 의해 이천,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했다가 여주로 숨었다.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고, 명성황후는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권력투쟁으로 인해 조정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그러다보니 지방관의 기강이 헤이해질 것은 당연지사였다. 당시 경상감사가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절에 사람을 보내 이장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 같은 탐관오리의 비행을 조정에 직소하기위해 승려와 신도의 연명을 받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을 결행한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향하던 조공사신행렬(일명 동지사)을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했다고 돼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행렬을 만난 듯하다. 참고로 동지사란 조선시대에 해마다 동지에 정기적으로 명과 청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당시 감계사 대표는 이중하 공조참의가 맡았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다. 후에 을미의병 거사로 많은 관리가 죽었으나 당시 관찰사였던 이중하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 봉변을 당하지 않았단다.

 

한편 승려들로부터 이 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 듣고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며 행렬을 돌려 군왕께 후보고 하였다는 일화다. 아마도 청으로부터 간도영역의 국경을 침탈하려는 청나라의 공세와 탐관오리의 사찰을 넘보는 행위가 같은 불의로 다가와서일까?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단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부임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다. 하지만 신임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어금혈봉표!”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인지 거대비석에 쓰인 어금혈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같지 않음은 어명의 서찰을 옮겨 쓴 것이기에 그런가하고 추측해 본다.

 

“御禁 穴封 表!”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봉표는 어명의 행정적 지휘인 반면에 다솔사 봉표는 직접적 지휘서신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분묘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나랏님이 구한 다솔사'라는 표현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다솔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기념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자연 사랑을 배워야 한다. 인문사에 있어 건축물도 문화재이겠지만 이 같은 정신문화적 기념비 역시 문화재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늦게나마 지방자치단체도 의미를 되새겨 지정문화재로서 복원하고 관리하여야 할 의무가 높다 하겠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 곤명면 다솔사(多率寺) 입구(入口)의 하늘을 찌를듯한 송림(松林) 기슭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각자(刻字)되어 있으니 이 연유(緣由)를 찾아 보기로 한다. 1880년대 이조 고종(高宗) 중엽 때의 일이다. 다솔사는 장군대좌설(將軍大座說)로 옛부터 명당(名堂) 대지(大地)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대좌국(大座局)의 명당(名堂) 자리에 선영(先塋)을 안장(安葬)코자 결행(決行) 일정(日程)을 잡았다. 다솔사 측으로 본다면 사찰(寺刹)의 명운(命運)이 걸린 일이 었으나 감사(監司)의 권세(權勢)에 눌리어 어떤 방안(方案)도 못 내고 머지않아 절(寺)은 폐허(廢墟) 될 것을 예견(豫見)하며 한탄(恨嘆)만 되풀이 하였다.

 

이때에 절에서 참선(參禪) 수학(修學) 중이던 호암(虎岩) 정암(正菴)의 두 스님이 결연(決然)한 마음을 갖고 전사승(全寺僧)과 신도(信徒)의 연서(連署) 탄원서(嘆願書)를 가지고 자청(自請) 상경(上京)하여 상소(上疎) 할 것을 책임(責任)지고 잔류(殘留) 승려(僧侶)에게는 돌아 올때까지 어떠한 난관(難關)이 있어도 입장(入葬)을 방어(防禦)하도록 당부하고 상경(上京) 길을 떠났다. 이 무렵 천왕봉(天王峰) 밑에 있는 미륵암(彌勒庵)의 부처님 영험(靈驗)이 대단(大端)하다 하여 신도수(信徒數)가 다솔사 보다 많았음으로 이들에게 호소(呼訴)하여 동정(同情)을 받아 함께 가세(加勢)하게 이르렀다. 두 스님이 상경(上京)한 수일(數日) 후 감사(監司)는 장례(葬禮)를 치루고자 다솔사 까지 왔으나 수백명의 승려(僧侶)와 신도(信徒)들이 장례 하려는 곳에 돌팔매를 우박 쏟듯 하며 결사반대(決死反對) 함으로 부득이 강행(强行)을 중단(中斷)하고 후일을 미루며 하산(下山)하였다.

 

한편 상경(上京)한 호암(虎岩) 정암(正菴) 두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고 걸어 목적지 서울에 닿아 돈화문(敦化門)에 이르니 저 멀리서 쉬잇 소리를 외치면서 어느 대관(大官)이 행차(行次)를 하는데 나졸(羅卒)이 앞서 행인(行人)에게 금족(禁足)지시를 하는지라 스님 한분이 어느 나졸(羅卒)에게 물으니 청국(淸國)으로 가는 사신(使臣)인 동지사(冬至使)가 떠나기에 앞서 선산(先山) 성묘(省墓) 행차(行次)임을 알렸다. 두 스님은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機會)를 놓칠세라 행차(行次) 길 앞에 닥아가 선듯 부복(俯伏) 합장(合掌)을 함으로 동지사(冬至使)는 의아(疑訝)하여 어인 사연(事緣)인가를 물으니 두 스님은 방성호곡(放聲號哭)을 하면서 다솔사(多率寺) 구원(救援)의 탄원서(嘆願書)를 제출(提出)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탄원문(嘆願文)을 받아 보니 글귀가 한자 한자가 피 눈물로 맺어진 구불(救佛)의 읍소(泣訴)인지라 다 읽자 어느덧 감동(感動)이 되어 그 자리에서 지필묵(紙筆墨)을 내어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써 주며 말하기를 「상감에게는 이 길로 아뢸 것이니 입장(入葬)을 못 하도록 서둘러 내려 가라」지시(指示)하였다. 두 스님은 너무나 뜻 밖의 하회문(下回文)을 받고 백배(百拜) 둔수(頓首) 하면서 하향(下鄕)길을 재촉하였다. 도중(途中) 문경(聞慶) 새재(鳥嶺)에서 우연(偶然)히도 곤양(昆陽)으로 부임(赴任)하는 신관삿도(新官使道)를 만나게 되어 비장(裨將)을 통하여 이런일 있음을 고(告)하니 삿도 또한 부임(赴任) 인사차(人事次) 감사(監司)를 뵈 오려 가는 길이라 쾌(快)히 아뢸 것을 다짐하였다.

 

신관(新官) 사또는 대구(大邱) 경상감영(慶尙監營)에 이르러 감사(監司)에게 임지(任地) 보고(報告)를 마친 다음 이 사실(事實)을 말하게 되었다. 듣고 있던 감사(監司)는 대노(大怒)하면서 임지(任地)에 닿기도 전(前)에 직권(職權)을 남용(濫用)하여 상사(上司)를 우롱(愚弄)함은 용서(容恕)할 수 없다 하며 호통을 쳤다 한다. 이때 곤양군수(昆陽郡守)는 옷 소매에서 글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면서 “어명(御命)이요”라고 소리치니 감사(監司)는 혼비백산(魂飛百散)되어 대청(大廳) 아래 꾸러 엎드리니 군수(郡守)는 소리도 드높여「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하고 외쳤다 한다.

 

이리하여 감사(監司)의 헛된 입장(入葬)의 욕망(慾望)을 무산(霧散)시켜 좌절(座折)되었으니 이 두 스님과 명관(名官)의 도움으로 다솔사(多率寺)는 구제(救濟)되었고 사승(寺僧)및 신도(信徒) 모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불력(佛力)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깨달으며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敦篤)히 하였다 한다. 후일(後日) 호암(虎岩) 정암(正庵) 두 스님은 불도(佛道)에 정진(精進)하여 이름 있는 대승(大僧)이 되었다 한다. 이로부터 입구(入口) 바위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새겼으니 누구도 헛된 야욕(野慾)을 가지는 자(者) 없었다 한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는 고종22년 (1885)에 각자(刻字) 되었음으로 이후 다솔사 역내(域內)에는 분묘(墳墓)가 어명(御命)으로 금지(禁止) 되었었다.

 

▲어금혈봉표

 

▲어금혈봉표

 

▲어금혈봉표

 

▲어금혈봉표

 

▲어금혈봉표

 

▲어금혈봉표

 

 

 

  <2018.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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