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지리산문화권

사천 보안암 석굴

蔥叟 2018. 8. 23. 06:53

사천 보안암 석굴

 

보안암은 다솔사에서 서북쪽으로 약 2km쯤 떨어져 있으며, 위치는 곤양면 무고리 천왕봉(일명 : 수명산) 산정 가까운 산협을 이용하여 그 중앙에 위치해 있다. 보안암 또는 미륵암(彌勒庵)이라고도 하는데 알려지기로는 보안암석굴로 더 유명하다. 지금도 흔히 미륵암으로 통한다. 보안암은 현재 다솔사(多率寺)에 귀속돼 있으나 과거 서봉사(栖鳳寺)가 폐사되기 전까지는 서봉사에 딸린 암자였으며, 현재의 보안암은 1947년 5월 비구니 백연화(白蓮花)에 의하여 소규모의 암자를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보안암은 높은 석축 위에 보안암 석굴을 중심으로 좌측에 청기와로 된 요사채와 우측에는 작은 규모의 암자가 있는데, 석굴의 좌향은 동향(東向)으로 되어 있으며 면적은 56평 정도이다. 따라서 석굴의 창건 연대는 여러 설이 있으나 어느 설도 명확하지 않고, 다만 경주 석굴암의 축조형태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1336년(충숙왕 복위 5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서봉사사적(栖鳳寺事蹟)>에 의하면, 서봉사의 남쪽 천령(天嶺)위에 석감(石龕)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봉안하였다고 하였고, 1657년(효종 8)에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栖鳳寺記)>에도 미륵암, 봉암암(鳳岩庵), 직조암(直照庵) 등 동· 서· 남의 삼암(三庵)은 서봉사에 속한 암자로서 미륵암에는 ‘장육석불(丈六石佛)’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 황수영(黃壽永) 교수의 조사(1964년)에 의하여 그가 쓴 논문에서 이 석굴의 불상은 그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였다.

 

석굴의 외부 형태는 정면 약 9m정도이고 측면은 7m쯤 되는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자연석 막돌을 허튼층으로 쌓았다. 이 석굴의 3면은 높이 2m정도까지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그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져 ‘우원방형(隅圓方形)’의 형태로 마무리되어 지상에서 정상까지의 높이는 약 5m정도 된다. 뒷면은 지형이 경사져 있으므로 수직에 가까워 벽체는 없고 정면과 좌우 3면 상부는 완만한 형태로 경사면과 일치하고 있어서 마치 적석총(積石塚)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정면 한가운데 폭 1.4m정도 되게 벽면에서 대략 50cm정도 돌출시켜 한 변이 25cm정도 되는 사각형 형태로 1차 가공을 하였으나 다듬지 않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상부에는 석주와 같은 형태의 긴 돌을 수평으로 기둥 위에 걸쳐 지탱한 다음 상부에는 벽체와 유사하게 막돌을 포개어 쌓아 지붕처럼 구성하였다. 또한 최근에 설치한 석등롱(石燈籠) 2개가 입구 좌우에 놓여져 있으며 입구를 통해 석굴 내부까지 거리는 벽체의 두께만큼인 1.65m정도 된다. 내부는 가로 3.3m, 세로 2.8m, 천장높이 3m정도 되어 거의 정육면체에 가깝게 뚫려 있으며 한가운데 높이 1.8m정도의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항마수인(降魔手印)의 여래석상(如來石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석을 소박하게 다듬은 나한상(羅漢像) 16구가 보위하고 있다.

 

석실의 천장구성은 대단히 크고 긴 석재로 정면에서 배면 쪽으로 여래좌상 좌우로 보아 같은 역할을 하도록 2개를 걸치고 상부에 넓고 평평한 자연석을 포개어 천장을 덮고 있는 매우 고졸(古拙)한 형태이다. 대체로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불상의 조각수법과 전형적인 말각조정(抹角調整)이나 궁륭방식(穹隆方式)을 쓰지 않은 천장가구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굴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보안암 석굴(普安庵 石窟)은 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암자로서 옛날에는 미륵암(彌勒庵)으로 불렸고 지금도 흔히 미륵암으로 통한다. 보안암의 소재(所在)는 곤양면 무고리(舞鼓里)에 속하고 있다. 이 절은 건립초(建立初)부터 다솔사(多率寺)에 소속된 암자일 뿐 아니라 옛적에는 서봉사(栖鳳寺)에 속해 있었던 절이었다. 1336년에 이곡(李穀 : 牧隱의 父)이 쓴 서봉사사적(栖鳳寺事蹟)에 의하면 서봉사의 남쪽 천령(天嶺) 위에 석감(石龕)을 만들어 미륵석상(彌勒石像)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때의 두 왕자(王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17세기 중엽의 최응천(崔應天)도 미륵봉(彌勒峰)의 석실(石室)안에 장육석불(丈六石佛)이 봉안 되어 있다고 서술하였었다. 신라 흥덕왕5년(830)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선지(選地)했다는 설(設)이 있으나 문헌(文獻)에는 없고 최근 황수영(黃壽永) 교수(敎授)의 조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그 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 보아 고려말의 작품(作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석실(石室)은 이곡(李穀)이 사적기(寺蹟記)를 쓰던 1336년 이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 만큼 문헌상(文獻上) 기록과 불상(佛像)의 양식(樣式)을 더 깊이 고증(考證)한다면 새로운 사실(事實)이 발견될 것임으로 학구(學究)의 필요를 느끼며 이에 황수영(黃壽永) 교수의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에 관한 논문을 수록한다.

 

사천 보안암 석굴 - 황수영.hwp

 

▲보안암 전경

 

▲보안암 전경

 

▲보안암 전경

 

▲보안암 전경

 

▲보안암 전경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굴

 

▲보안암 석불

 

▲보안암 석불

 

 

 

  <2018. 7. 28>

사천보안암석굴(泗川普安庵石窟)과 하동리맹굴(河東理盲窟).hwp
0.01MB
사천 보안암 석굴 - 황수영.hwp
0.02MB

'◈한국문화순례◈ > 지리산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천 다솔사 대양루  (0) 2018.08.24
사천 다솔사 어금혈봉표  (0) 2018.08.24
사천 보안암 가는 길  (0) 2018.08.23
남원 북천리 석장승  (0) 2018.06.02
남원 서천리 석장승  (0) 2018.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