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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상징 - 아우카나 대불

蔥叟 2018. 4. 5. 02:59

스리랑카의 상징 - 아우카나 대불

 

Aukana Buddha Atatue

 

아우카나 부다는 스리랑카의 불교 미술 가운데 유명한 작품의 하나이다.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포스터나 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불상이다. 푸른 하늘을 향해 똑바로 솟은 흰 자태, 몸을 감고 있는 옷자락은 천 년 이상의 비바람을 견뎌내고, 지금도 또렷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불상만이 정글 속에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불상은 5세기 칼라 웨와 저수지를 만든 다투세나 왕 Dhatusena이 저수지 건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높이 15m의 흰 몸체는 화강암 Granite을 재료로 썼다. 코에서 물을 흘리면 똑바로 두발 사이에 떨어지도록 균형 있게 세워졌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600년 전의 작품인데 어느 한 부분 떨어지거나 금이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우카나 부다 양쪽의 빈 공터에는 새로운 불상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불상을 세운 왕 다투세나는 시기리야 레이디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한 카샤파왕의 아버지이다. 카샤파는 다투세나 왕의 둘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생겨, 결국 칼라웨와 저수지 부근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생매장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 그가 생전에 이땅의 사람들과 동 ∙식물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고 그 성공과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위해 아우카나 부다를 세웠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스리랑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 두 개를 꼽으라면 철옹성 시기리아 그리고 아우카나 대불을 꼽을 수 있다. 아우카나 부다는 스리랑카의 불교 미술 가운데 유명한 작품의 하나이다.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포스터나 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불상이다. 푸른 하늘을 향해 똑바로 솟은 흰 자태, 몸을 감고 있는 옷자락은 천 년 이상의 비바람을 견뎌내고, 지금도 또렷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불상만이 정글 속에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 아우카나 대불은 서기 5세기 다투세나Dhatusena 463~479 왕에 의해 만들어진 대불 사원으로 주변 칼라 웨와Kala Wewa 저수지 축성 사업 중 희생된 많은 영혼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우카나’란 의미는 ‘저수지의 한쪽’Corner of Tank이란 의미로 서기 5세기의 주력산업인 농업수확을 늘리는 일이 곧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드는 치수사업과 뜨거운 태양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성된 칼라 웨와 저수지 그리고 아우카나 대불은 남인도 안드라 양식의 스리랑카식 변형인 아바야 무드라Abhaya Mudra 양식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의미의 조각 양식이다. 가사를 길게 늘어뜨린 이 아우카나 대불은 스리랑카 전역에 세 군데 복제품이 있는데 콜롬보 및 폴론나루와 부근 길리탈레 호숫가 그리고 남부 벨루웰라 해안가에 3개의 모조품이 있다. 높이는 모두 12m이다. 뒤편 바위와 한덩어리로 되어있는 마애불이다. 더욱 돌라운 것은 이 불상이 1,600년의 긴 시간을 견디었는데도 어저께 조성한 것처럼 말끔하다는 것이다.

 

이 마애불을 세운 다투세나 왕은 시기리아 미인도를 그리게 한 카샤파 왕의 부왕이다. 카샤파 왕은 다투세나 왕의 첫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생겨 결국 칼라웨와 저수지 부근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생매장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다투세나 왕이 살아생전에 이 땅의 농사짓는 사람들과, 동식물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대형 저수지를 조성하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 위해 아우카나 대불상을 세웠는데도 정작 자신은 아들의 손에 죽어야만 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든다. 숲을 약 10분정도 걸어서 사원 입구에 이른다. 돌계단을 올라 나무 그늘에서 신과 모자를 벗고 맨발로 걸어가면 희고 큰 불상이 보인다. 높이 15m의 흰 몸체는 화강암 Granite을 재료로 썼다. 코에서 물을 흘리면 똑바로 두발 사이에 떨어지도록 균형 있게 세워졌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600년 전의 작품인데 어느 한 부분 떨어지거나 금이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아우카나 대불 보호각 씌우기 전의 모습

 

▲아우카나 대불 보호각 씌우기 전의 모습

 

 

 

<2018.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