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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불교 최초 전래지 - 미힌탈레

蔥叟 2018. 2. 9. 10:55

스리랑카 불교 최초 전래지 - 미힌탈레

 

Mihintale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성지이다. 1934년, 정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군이 발굴된 이래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순례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특히 불교 전래의 날이라 전해지는 매년 6~7월에 걸친 포야데이에는 이곳에 포손 축제가 열려 수천 명의 신자가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들은 단체로 미힌탈레 산 정상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만월을 향해 절을 올린다. 그러나 평상시의 미힌탈레는 조용한 농촌이다. 시가지라고 불릴 만한 곳도 없고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교차로 주변에 작은 집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해 마하세야 대탑으로 난 계단을 오를 때는 플루메리아의 달콤한 향이 난다. 부다 플라워(Buddha flower, 석가의 꽃)라 불리는 이 꽃이 성지로 향하는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 피로를 씻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스리랑카는 불교국이라 자부할 만큼 불교도가 많다. 불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고 많은 관습과 금기를 만들어 왔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온화한 생활 방식도, 여행객에게 친절한 따뜻함도 이곳 미힌탈레에서 시작된다.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장소인 미힌탈레를 이야기하기 전 먼저 동시대의 인도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대륙은 큰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마우리아Maurya왕조의 3대 황제인 아쇼카Ashoka대왕은 99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이어 정복 전쟁을 일으켜 인도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이런 피바람이 지나간 후 아쇼카는 무력에 의한 정치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면서 불교로 개종하였고 그는 무력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정치 즉 다르마Dharma의 통치를 선포하였다. 그는 전륜성왕이 되어 불교를 세계 각국에 전파시키는 데, 멀리는 희랍에서부터 가까이는 벵갈까지 불교를 전파하였다. 이때 스리랑카에도 그의 전처소생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스님을 통해 불교가 전달되었고, 아울러 전처소생의 딸인 샹가미타는 스리랑카에 보드가야 보리수를 전한다. 아소카 왕의 왕자 마힌다가 BC 247년에 데바남피야티사 왕에게 처음으로 불교를 전승시킨다. 불교에 귀의한 왕이 마힌다에게 이곳의 68개의 동굴과 승원을 기증하였고, 당시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꼭대기까지 네 지역으로 나누어 계단이 이어지는데, 계단이 1,840개나 되어 오르기에 힘이 든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오른쪽에 BC 1세기에 세웠다는 칸타카 치티야의 불탑이 나타난다.


다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마힌다 스님과 데바남피야티사 왕이 처음으로 만난 곳에 세웠다는 암바스탈라 대탑이 나타난다. 언덕 꼭대기에는 석가모니의 머리카락을 모셔놓았다고 하는 마하세야 불탑이 있다. 여기서는 아누라다푸라의 인공호와 불탑들이 바라보인다. 탑에는 마힌다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기원전 247년 6월 보름날, 아누라다푸라의 왕 데바남피야 팃사 Devanamipiya Tissa가 이곳으로 사슴 사냥을 나왔을 때의 일이다. 이 산의 신 데바는 불교를 퍼뜨리기 위해 찾아온 인도의 불교왕 아쇼카(아육왕)의 아들 마힌다 Mahinda를 만나게 하기 위해 사슴으로 변신했다. 왕은 마힌다와의 문답식 대화 끝에 불교에 귀의했다. 왕의 신하와 백성들 8,500명이 왕의 뒤를 이어 7일 만에 불교도가 되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왕은 감사의 표시로 마힌다에게 68개의 동굴과 절을 선물했다. 미힌탈레의 지명은 마힌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 이름은 미사카 산(山,Missaka). 스리랑카, 아누라다프라의 동쪽 13km에 있는 지상 300m의 언덕. 아소카 왕(B.C.3세기)의 아들 마힌다(Mahinda)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곳이라 한다. 언덕 위나 주변에는 마힌다가 살던 방의 유적,그 유골을 봉납한 무바스타라 탑,불타의 머리칼을 봉납했다는 마하세야 탑, 사방의 돌출부(突出部,바하르카다)에 우수한 조각이 있는 칸타카 추티야 탑(기리반다탑) 등 다수의 유구(遺構)가 있으나,대개 근세에 복원한 것이다. 미힌탈레라는 이 곳 지명은 이러한 역사를 말해 주는 듯 ‘마힌다의 언덕’Plateau of Mihindu이라는 뜻이며 이 탑의 이름인 암바스탈라 또한 ‘망고’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힌다Mahinda는 싱할라 발음으로 미힌두Mihindu로 변형되어 마힌탈레가 아니라 미힌탈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서 상의 기록일 뿐 기원전 247년에 이르러서야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에 대해 만족해하는 스리랑카 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널리 믿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불교 전래 시기는 스리랑카의 건국 설화와 연관돼 있다. 고대 스리랑카의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건국은 기원전 6세기 인도로부터 건너온 스리 위자야 일행에 의해서인데 이 설화는 7세기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도 소개되어 있다.『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스리랑카에 최초의 나라를 세운 스리 위자야는 사자와 인도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아버지인 사자를 죽이고 스리랑카로 넘어와 섬에 살고 있는 온갖 야차들을 정복한 후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자의 후예’라는 뜻의 싱할라(Sinhala) 민족이 스리랑카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기원전 543년으로 바로 상좌부 불교계에서 사용되는 붓다의 입멸연대와 일치한다는 것이 스리랑카 사람들의 믿음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붓다와 연계시키고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이 같은 믿음은 붓다를 향한 그들의 깊은 신앙의 단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리랑카 사람들이 붓다의 입멸 연대를 싱할라 민족의 시원으로 삼는 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기어코 이 섬에서 붓다의 흔적을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점이다. 스리랑카에는 붓다께서 재세 시에 이 섬을 방문했다는 유적이 3곳이나 있는데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붓다를 향한 이들의 눈물겨운 신심이 만들어낸 자랑스런 믿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미힌탈레 전경

 

▲미힌탈레 전경

 

▲미힌탈레 전경

 

▲미힌탈레 전경


▲미힌탈레

 

▲미힌탈레

 

▲미힌탈레

 

▲미힌탈레 주변 풍광

 

▲미힌탈레 주변 풍광

 

▲미힌탈레 주변 풍광

 

▲미힌탈레 주변 풍광

 

▲미힌탈레 주변 풍광

 

 

 

<2018.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