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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년 전의 고래사냥 -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탑본

蔥叟 2016. 8. 31. 08:38

삼천년 전의 고래사냥 -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탑본

 

1971년에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16곳의 암각화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암각화는 30여년 전 불적조사차 이곳에 왔던 동국대학교 문명대교수가 바위에서 진귀한 그림들을 발견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각종 동물그림들인데 수천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새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림의 윤곽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넓이 6미터 높이 3미터 정도에 일일이 쪼아서 형태를 만든 그림들이 밀집해 있는데 대략 220~30 종류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그림은 바다동물과 육지동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바다동물에 서 주로 보이는 것은 고래다. 고래들이 떼지어 한 방향으로 헤엄쳐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고래 무리 중에 상어도 보인다. 작은 물고기들도 있고 물개의 모습도 보인다 고래를 잡은 뒤 고래 옆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육지동물은 대개 오른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표범도 보이고 떼지어 가고 있는 사슴도 보인다. 이 그림들은 특히 실제 생활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어느 유적보다도 과거의 생활을 들여다보는데는 대단히 귀중한 유적이다.


암각화는 크게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왼쪽은 동쪽, 즉 동해안 바다 쪽이고 오른쪽은 육지 쪽이다. 그런데 왼쪽 그림에는 유난히 고래가 많이 새겨져 있다. 모두 68점의 바다동물 가운데 43점이 고래다. 절반 이상이 고래인 것이다. 그런데 고래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이것은 고래의 종류를 표현한 것이다. 고래는 물을 뿜어내는 모습에 따라서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V자형으로 물을 뿜어내는 긴수염고래, 몸체에 여러 개의 긴 선을 그어놓은 흰긴수염고래, 반만 쪼아서 판 범고래, 그리고 입모양이 유난히 강조되어있는 귀신고래, 입모양이 뭉툭하게 그려져 있는 향유고래등. 그 모습이 정확히 새겨져 있어 마치 사진을 보고 고래를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모양새가 똑같다. 이렇게 고래의 특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이런 그림들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고래를 이 정도로 자세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고래를 아주 가까이 에서 접했다는 얘기이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암각화는 고래의 종류뿐 아니라 생태도 정확히 표현되어있다. 고래는 바다의 포유동물로 여러 가지 독특한 생태를 가지고 있다. 귀신고래는 아기를 등에 업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 아기 고래는 30초 이상 물 속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면 위에 떠올라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고래는 얕은 돌 틈 사이나 해조류를 비집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먹이를 먹을 때 바닷물을 삼킨 뒤 물을 뿜으며 먹이를 걸러내고 또다시 바닷물을 삼키는 과정을 되풀이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표현한 그림도 암각화에는 빠지지 않았다.


고래의 종류뿐 아니라 고래의 생태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고래를 늘 접했던 사람, 즉 고래잡이를 했던 사람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면3천년전 동력선도 없고, 총도 없었던 대에 고래를 잡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데 암각화에는 고래를 잡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오른쪽에 큰고래가 있고 왼쪽에 초생달 같이 생긴 배가 새겨져 있다. 배 안에는 사람이 20명이 타고 있으며, 배보다 더 큰 고래를 배에 연결해서 끌고 가는 모습이 생생하다. 그리고 배와 배 사이에는 부구(浮具)도 달려있다. 크고 힘이 센 고래가 작살을 맞으면 저항이 아주 심해지는데 이 부구를 연결하면 고래가 저항을 하더라도 배에 충격이 적게 갈 뿐만 아니라 고래가 빨리 지치게 되고 죽은 뒤에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된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고래잡이는 고래를 잡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고래잡이의 마무리는 분배다. 이때는 고래잡이에 기여한 정도나 마을의 원로등을 고려해서 철저한 규칙을 가지고 분배한다. 고래분배는 바로 그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나름대로의 규범과 질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분배그림이 암각화에도 있다. 이 그림을 에스키모의 분배규칙에 따라 나눠보면 모두 14토막이다. 이 한 토막 한 토막을 부위별로 나눠 갖는 주인공이 달랐을 것이다. 이는 곧 3천년 전 암각화의 주인공들에게도 나름의 사회질서가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는 본격적인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수렵이나 어로 생활도 하지만 그보다는 농사가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자리잡은 시기이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3천여년 전 반구대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여느 지역과는 달리 농사보다는 고래잡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고래는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기름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에스키모나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은 고래 사냥철이 되면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가 중요하게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암각화는 경제 생활의 변화상을 담고있는 하나의 기록이다. 3천년전 반구대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바로 암각화의 새김방법에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새겨져 있다. 하나는 면 전체를 쪼아서 판 면새김이고 또 하나는 그림의 윤곽만을 쪼아서 만든 선새김이다. 그런데 면새김한 부분들만을 뽑아서 보면 그림이 아주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선새김한 그림들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면새김이 먼저 자리잡고 그 빈 공간에 선새김이 새겨진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두 그림을 조합해서 보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해진다. 고래 위에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면새김과 선새김한 그림을 비교해보면 사회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먼저 면새김한 그림에서는 바다동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나중에 새겨진 선새김 그림을 보면 바다동물이 21마리인데 비해 육지동물이 68마리다. 면새김의 경우 해양문화와 상당히 가까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선새김은 내륙문화쪽하고 아니면 농경문화에 상당히 근접돼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가 안정되고 난 뒤부터 태화강이 가져온 퇴적물이 쌓여서 바다는 차츰 뒤로 밀려서 현재 위치까지 오게되고 고래 수확량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것이 반구대 암각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바닷물이 서서히 빠지면서 반구대 사람들은 청동기시대 여느 지역의 사람들처럼 농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암각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나중에 그려진 선새김 그림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울타리 안에 그려진 돼지나 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축의 등장은 농경사회가 고도로 발달한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수렵생활도 병행하게 된다. 때문에 이전에 비해 수렵기술도 눈에 띄게 발달하게 되는데 면새김 그림에선 집단사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즉 사람이 직접 동물과 맞서서 사냥을 했다. 이에 비해 나중에 새겨진 선새김 그림에는 사냥을 하는 사람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틀이나 덫, 그물 같은 도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끼까지 사용하게 된다. 그림에는 울타리 안에 돼지가 한 마리 있고 그 앞에 점박이 사슴이 매여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수렵의 대상이었던 사슴이나 가축을 미끼로 이용해서 맹수를 잡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짐승을 잡을 수 있는 사냥 기술의 발달이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반구대 암각화 탑본


그렇다면 반구대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암벽에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그림이 당대 뿐 아니라 후대를 위한 교육용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책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사냥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현장에 나가서 사냥기술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고래잡이는 직접 바다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고래 모형을 가지고 고래 심장부에 정확히 작살을 꽂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만큼 고래사냥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엄격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는 이곳이 선사시대 사람들의 기원이 서려있는 제단이었고 암각화는 그들의 기원을 담은 제단화(祭壇畵)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그림이 암각화에 그려져 있다. 바로 동물들 사이에 그려져 있는 20명의 사람이다. 양손을 올려 춤을 추는 모습, 나팔같은 악기를 부는 모습 등 이러한 것은 샤먼이 춤을 추는 것과 같이 고래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의식행위를 하는 모습이다. 또 얼굴만 표현된 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은 일종의 호신부(護身簿)이다. 그런가 하면 이 암각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어있다. 이는 생식의 기원을 증폭시킴으로서 식량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이 되므로 생식에 대한 기원을 암각화를 통해 기원하는 전통은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3천년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덫과 같은 나름대로의 도구를 이용해 맹수를 잡거나 고래사냥을 할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사회질서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3천년전의 사회는 우리의 선입관처럼 그러한 원시사회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반구대 암각화는 기록보다 더 정확한 역사인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 탑본

 

 

 

<2016.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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