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문화순례◈/일본문화권

조선통신사의 길 -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수젠지 면암선생 순국비

蔥叟 2016. 2. 18. 07:33

조선통신사의 길 -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수젠지 면암선생 순국비

 

수젠지를 찾은 것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기 때문이다. 수젠지(修善寺)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 감옥에 갇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영정을 모신 곳이다. 순국비 정명에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공적비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에서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우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적사(謫舍:귀양가서 사는 집)에서 순국하셨다. 수선사(修善寺) 창건에는 백제승 법묘니(法妙尼)와 관계가 있다고 전하며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선생은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새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저 한다.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건립위원회" 라고 적혀있다.

 

최익현(1833 ~1906)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1876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1895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단식을 하다가 순국하신 분이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였다. 이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하거나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보여준다. ,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 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1906년 윤4월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였다.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 순국비

 

▲최익현 순국비

 

▲최익현 순국비

 

 

 

<2016.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