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종파 조동종 사찰 - 일본 대마도 엔쓰지 통신사 이예 공적비
通信使李藝功績碑
원통사 계단을 오르기 전 오른편에 통신사 이예 공적비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하나 보인다. 공적비는 높이 3m 50cm, 폭 70cm이며 그 옆에는 이예 선생의 활약상과 공적이 적혀 있는 높이 1m, 폭 2m의 부비가 있다. 부비에는 조선전기(朝鮮前期) 통신사(通信使)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 1373 ~ 1445라고 적혀 있고 가적인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예는 학성이씨의 시조로 벼슬이 종2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이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사행(使行)은 조선 전기의 18회와 후기의 12회를 합쳐 모두 30회였다. (公)은 그 중 6회의 사행에 정사 또는 부사로 참여하였으니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태종, 세종대에 유구(오키나와), 대마도, 일기도(이끼)에 14여회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조일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癸亥條約)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 업적을 남겼다. 계해약조 ; 계해조약이라고도 하며 1419년 대마도를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대마도주 정종무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이며 삼포조약이라고도 한다. 삼포란,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 지금의 경남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熊川) 내이포(乃而浦:薺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方魚津)과 장생포(長生浦)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 염포(鹽浦) 등을 말한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 물레방아와 무쇠로 만든 대포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조일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은 외교업무로 대마도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도주 정종무의 사망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를 찾아 조문하였다. 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2005년 2월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니,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오늘 공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현창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한때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조정의 노력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원통사가 있는 사카지역은 14세기 대마도주가 머물면서 번창했던 대마도 정치의 중심지다. 원통사에 자리한 이예의 유적이 있는데 이예의 공적비이다. 이 공적비가 원통사에 서있는 이유가 있다. 1408년 대마도주가 지었다고 알려진 이 원통사는 조선에서 온 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했을때 머무는 장소로 대일외교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예 역시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대마도 역사를 세권으로 정리한 대마국지를 펴냈다. 이 대마국지에는 이예가 십여차례 대마도를 오가면서 조선인 포로를 소환해갔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특히 대마도에 발자취를 남긴 이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선초기 태종 세종때 대마도.구주각국 .오끼나와까지40여회나왕복한 대단한 외교관이엿다.학성있는 하사성씨이고 이후락씨가현대 대표적 학성이씨다. 비명을 조선통신사라고쓰지않고 <통신사>만 쓴것이 정확하다.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朝鮮前期通信使 忠肅公李藝 (一三七三~一四四五)는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 벼슬이 종이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使行은 조선전기의 十八回와 후기의 十二回를 합쳐 모두 三十回였다. 公은 그 중 六回의 使行에 正使 또는 副使로 참여하였으니,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公은 태종‧世宗 代에 일본‧유구‧대마도에 四十여회 파견되어 六六七명의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朝日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朝日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公은 외교업무로 대마도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島主 宗貞茂의 사망 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圓通寺)를 찾아 조문하였다. 公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二00五年 二月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니,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오늘 公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현창하고자 이碑를 세운다.
▲통신사 이예 공적비
▲통신사 이예 공적비
▲통신사 이예 공적비
▲통신사 이예 공적비
<2016.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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