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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종파 조동종 사찰 - 일본 대마도 엔쓰지

蔥叟 2016. 1. 29. 08:15

최대종파 조동종 사찰 - 일본 대마도 엔쓰지

 

圓通寺(円通寺), Entsuji Temple

 

엔쯔지는 7대 도주였던 소 사다시게가 지은 자신의 저택이며 통치관청이었고 소 사다모리의 보리사(조상의 위패를 모신 절)이기도 하다. 엔쓰지는 1408년 대마도 7대 도주 종정무가 규슈의 치쿠첸에서 건너와 최초로 도부를 개창한 곳으로 7~9대 3대에 걸쳐 쓰시마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때를 사가시대(佐賀時代)라고 하며 60여년 간 존속했다. 그 중 제8대 종정인 소 사다모리(宗貞盛)의 법호가 원통공이었으므로 이곳을 원통사라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엔쓰지 동뽁 본존불과 원통곤 위패를 모신 묘천사가 보리사였는데 1871년에 본존불과 위패를 원통사로 옮겨와 이곳이 원통공의 보리사가 되었다고 한다. 보리사는 한 집안에서 대대로 장례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어 명복을 빌고 천도와 축원을 하는 개인 소유의 절을 말한다. 사카(佐賀)지역은 1397년경부터 소 사다시게(宗 貞茂)에서 사다모리(貞盛), 시게토모(茂職)로 이어지는 3대의 도주가 이 지역에 정착한 이후 많은 무사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무로마치(室町)시대 쓰시마 통치의 중심지로 번창한 곳이다. 엔쓰지는 1408년 7대 번주(藩主)인 소 사다시게가 지은 저택으로 10대 사다쿠니가 이즈하라로 저택을 옮길 때가지 78년간 통치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소 사다모리의 보리사이기도 하며 절 뒤편에는 소(宗)가 일족의 묘지가 있다.

본전 안에는 동제 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안에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약사여래는 중생을 병이나 재난에서 구해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시무외(施無畏,중생을 보호하여 두려움을 없애는 일)의 인(印, 불상이 손가락 끝으로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상)을 맺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엔쓰지의 동조약사여래좌상 역시 왼손에는 약병을 얹어 무릎 앞에 내밀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모으고 가부좌로 앉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둥그스름한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옷은 목 부분이 크게 벌어져 가슴 밑까지 패여 복부 윗부분에 아래옷과 그것을 묶던 허리띠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옷의 주름은 간소에게 정리되어 있으며 옅은 붉은색을 띄는 도금도 잘 남아 있어 거의 손상이 없는 상태이다. 고려시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종류의 약사여래상은 쓰시마, 이키, 규슈 북부에서는 유일한 것이며, 한국에도 약사불상은 그 수가 적어, 매우 양호한 보존 상태로 인해 그 가치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일본 조동종의 종조(宗祖)인 도겐(道元: 1200~1253)은 1227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장옹여정(長翁如淨)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계승하였다. 그는 1229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도겐은 묵조선을 수양하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제창하였다. 따라서 도겐의 조동종에도 주관적 관념론의 철학사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는 "심이란 일체의 법이요, 일체법이란 다만 일심(一心)인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은 모두 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그의 사상은 임제선(간화선)의 철학사상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종은 일본에 전파되자 조정과 막부 장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크게 흥성하였다. 그런데 조동종의 신도는 대부분이 하위층 농민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에서는 "조동의 농민, 임제의 장군"이란 말이 전해졌다.  선승들은 송나라를 자주 왕래하여 송대의 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였으며, 일본의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오산문학(五山文學)을 형성하였다. 2012년 현재 일본 불교 최대 종파이다.

 

▲엔쓰지

 

▲엔쓰지

 

▲엔쓰지

 

▲엔쓰지

 

▲엔쓰지

 

▲엔쓰지

 

▲엔쓰지

 

 

 

<2016.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