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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길 - 창원 망산도

蔥叟 2016. 1. 8. 09:37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길 - 창원 망산도

 

망산도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가락국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하여 멀리 배를 타고 가락국에 건너 와서 상륙한 돌섬이다. 그때의 상황을 삼국유사는 가락국기에서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건무 24년 무신(48) 727일에 구간 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왕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로 삼게 함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 -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경기 안에  있는 나라 - 에 가도록 했다. 문득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와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내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배 안에 탔던)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라 수가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유사를  데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는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또 시종해 온 잉신(시집갈 때 따라가는 시신)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보, 조광이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정, 모량이라고 했으며, 또 노비까지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20여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 능라의 옷과 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이제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니 왕은 친히 나아가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많은 군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의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 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열리는 좋은 과일)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 서왕모의 정원에서 자란다는 복숭아로 3,000년마다 1번씩 열매가 열리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신하들이 허황옥이 탄 배를 멀리서 보고 즉각 왕후의 배임을 알게 된 것은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갖춘 배였기 때문이다. 붉은 색은 해, , , 황금빛과 더불어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체로서 신화주인공에게 신성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허황공 일행이 타고 온 배가 오늘날 용원동 앞 바다에 수중암의 형태로 남아있다. 하늘로부터 수직으로 강림하는 신화주인공들과 달리, 허황옥처럼 수평으로 내림하는 신화주인공은 배를 타고 이동한다. 배는 흔히 수중암으로 형상화된다. 망산도 바로 앞의 수중암인 쪽박섬, 볼배, 석주로 대체되는 것이다. 허황옥의 쪽박섬은 떠오는 섬, 일명 浮來島이다. 부래도는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도 나오지만 신내림의 상징이다. 신의 내림의 상징인 부래도는 후대로 오면서 신의 거처로 변모된다. 소산으로 친해진 대왕암은 허황옥의 쪽박섬, 탈해의 홈바위, 연오랑세오녀의 바위 등과 같은 부래도이다. 신의 내림이 아니라 신의 거처이다.

 

망산도는 허황옥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횃불을 올린 곳이자 허황옥이 가장 먼저 도착한 지점이다. 망산도는 단순히 산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망제를 드린 곳이다. 망제란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올리는 제사이다. 부래도 주변에 ‘’이라는 명칭을 가진 곳이 산재해 있다. 망산도, 망해사, 해방산의 망자에는 망제를 올린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잇다. 허황옥이 망산도에서 한 일은 망제를 올리는 일이었다. 이는 통과의례의 하나인 이주의례를 치른 것이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열 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 성을 받았으나 아래 두 아들은 허씨 성을 받았다. 허황옥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망산도에서 이주의례 후 허황옥은 육지에 올라 언덕에서 쉬며 비단바지인 능고를 벗어 그것을 폐백으로 삼이 산령에게 바쳤다. 이는 토속신에게 저를 올림으로써 다시 한 번 이주의레를 치렀다고 볼 수 있고 수로왕을 만나기에 앞서 성인의례 또는 혼인 의례를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에서와 마찬가지로 비단은 신성성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이는 비단이 당시에 선진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평으로 내림하는 여신들은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신들과 달리 처음부터 신성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신들은 공히 비단을 통해 그 신성성을 확보한다. 이는 비단이 지닌 신적인 능력을 지닌 이가 아니면 지니거나 만들 수 없는 보물이라 인식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적 모티프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민족은 지구상에 많다. 중국의 한족 여인들도 바지를 입는데, 처녀와 유부녀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처녀들만 바지(kameei) 위에 원피스(salwal)을 입다가 初經이 지나 성숙한 여인이 되면 자타이(satai)라는 저고리에 파바다(pavadai)라는 긴 치마로 바꾸어 입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니까 허황옥이 입고 있던 바지를 벗는 행위는 미혼녀의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려는 인도식 통과의례로 해석된다.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망산도 비

 

▲망산도 비

 

 

 

<2015.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