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길 - 김해 허황후릉
구지봉 동쪽에 있는 이 능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비릉이라고 전해오는 고분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후는 옛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영제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 왕후가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했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되어있지 않다. 능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다. 능의 전면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다.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이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능비에는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 새겨져 있다. 崇善殿志에 의하면 이 능비는 조선 인조 25년인 1647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보주는 어디인가?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의하면 普州는 중국 四川省 安岳縣의 옛 이름으로 周나라에서 宋나라시대 까지 쓰이던 지명이다. 그러니까 1~2세기 東漢 즉 後漢 때 蜀(유비의 땅)이 고향인 여인이 가락국에 시집와서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왕비를 기리는 뜻에서 普州太后라는 시호가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二十五史 中 後漢書에 1,2세기 光武帝 때 기록에 의하면
○建武二十三年南郡蠻叛遣武威將軍劉尙討之徒其種人於江夏(武漢地方)
건무23년 남군 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위장군 유상을 파견하여 토벌했다. 만족들을 강하로 이주시켰다.
○和帝永元十三年(AD101)許聖等以郡收稅不均懷怨恨屯聚反叛明年夏遣使者督荊諸郡兵萬餘人討之……大破聖等乞降復徒置江夏
화제영원 13년 허성의 무리가 세금 차별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 여름, 정부는 사자를 파견하여 형주의 여러 군의 1만여 병을 독려하여 반란군을 토벌했다. 허성 일당을 크게 격파했더니 허성이 항복했다. 이들을 또 다시 강하로 이주시켰다.
<후한서>
첫번째 기록의 건무 23년은 서기 47으로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하기 1년 전이며, 무한 지방은 장강 중류에 있는 오늘날의 武漢지방이다. 두번째 기록에 의하면 반란의 주동자가 허씨 성을 가진 허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蜀의 普州人들이 이 봉기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봉기에 실패하고 무한지방으로 이주당한 사람 중에서 젊은 처녀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에 가서 수로왕과 혼인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가락국 수로왕릉 정문에 있는 쌍어문이 사천성과 무한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추리가 가능해진다. 이는 한 나라 때 쌍어문을 상징적 존재로 숭배하던 어떤 제사 집단이 자기의 고유 신앙생활을 위하여 지은 사당이나 제기에 담은 무늬이다. 또한 後漢書에는 許聖의 許는 세습되는 巫師, 이교도의 신앙지도자로서 신분이 세습되는 사람, 즉 종교적 호칭이라고 밝히고 있다. 보주(현재 안악현) 瑞雲鄕이라는 마을뒷산에 있는 東漢時代墓 입구안벽에서 神魚像이 발견되었고 내려오는 길 비탈길 암벽 앞에 '神井'이라 음각된 작은 우물에도 神魚像과 함께 후한 때의 금석문인 '神井記'라는 명문에 '許女黃玉'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신정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神井記
普州東里鐘地靈出奇氣振人傑出英聲.
許族早居于斯, 長傳 佳話, 其宅後山如獅, 前原似錦,
崖下井水淸冽旋汲旋盈, 大旱 不竭, 東漢初,
許女黃玉姿容秀麗, 智勇過人. 兒時喜聆先輩逸事,
嘗聞, 祖云, 丁卯饑饉, 人多逃荒, 適母臨 ,
遂絶流離出念賴父行乞, 度日.
余呱呱墜地. 無哺乳爾, 曾祖虔禱于井冀獲天賜, 移時,
中有魚躍, 折枝垂釣, 日得二尾, 烹爲羹作乳汁.
如是經年. 汝祖因以存活, 家人感其靈異,
尊爲神井, 而許氏亦由此繁衍昌盛.
成望族焉
-乙酉春三月上浣毅旦立-
신정기(神井記) 번역문(飜譯文)
普州(보주) 땅 동쪽 마을 鐘地(종지)란 곳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솟아 인걸이 떨치고 영명한 역사가 있다. 許氏族(허씨족)은 일찍부터 이곳에 살았는데 훌륭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진다. 그 집 뒷산은 사자와 같고 앞뜰은 비단과 같았다.
바위 아래 우물이 있어 맑은 물이 넘쳐흘러 긷는 즉시 가득 차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東漢(동한) 초에 許黃玉(허황옥)이라는 소녀가 있어 용모가 수려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정묘년에 기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침 어머니(증조모)가 産氣(산기)가 있어 떠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남게 되었다. 아버지(증조부)가 구걸을 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때 내(조부)가 이 땅에 태어났으나, 먹을 젖이 없었다. 증조부가 우물가에서 경건히 하늘의 도움을 빌자, 이윽고 우물 속에 물고기가 뛰어 올랐다. 나뭇가지를 꺾어 낚시를 드리워 하루에 두 마리씩 낚았다. (물고기를) 쪄서 죽을 만들고 유즙을 만들어서 여러 해를 지낼 수 있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이리하여 살아남았다. 후손들이 그 (우물의) 신령스러움에 감복하여 神井(신정)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래서 許氏族(허씨족)이 오늘날과 같이 번창하고 위대한 씨족이 되었느니라.』
을유년 춘삼월 상순 의단 세움.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허황후릉
▲능비
<201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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