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의 길 - 경주 아진포
양남면 하서리 일대의 진리(津里) 또는 하서천 일대는 석탈해왕이 도래한 하서지촌 아진포로 여겨지고 있다. 이곳 일대에는 석탈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한 ‘수아(水兒)’, ‘장아(長兒)’, ‘내아(乃兒)’, ‘나아(羅兒)’, ‘아진포(阿珍浦)’ 등의 지명들이 남아있다. 신라 6부시대 금산가리촌에 속했던 양남일대를 서촌(瑞村)으로 불렀고 이 마을이 속한 아진포는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마을이름도 ‘나아(羅兒)’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진리해변
▲진리해변
수애(收愛)는 신라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 하여 ‘수아(水兒)’ 혹은 ‘수애(水愛)’라고 불렀다 하며, 나아천(羅兒川)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수남(水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아(長阿, 長兒)는 옛날 석탈해왕이 장성할 때까지 자라던 곳으로 ‘양아(養兒, 養阿)’, ‘양아벌’, ‘장알’이라고도 한다. 보릿개는 보리밭이 많은 포구(浦口)라 ‘보릿개’, ‘버릿개’, ‘모포(牟浦)’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하(松下)는 소나무밭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솔밭’, ‘송알’, ‘송하’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석탈해의 탄강설화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설화가 자세히 실려있다.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한가운데 웬 배가 정박하였으므로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울리면서 맞아서 머물도록 하려 하였더니 배는 그만 나는 듯이 달아나서 계림 동쪽의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이때에 갯가에는 한 노파가 있었는데 이름이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니 곧 혁거세왕의 배꾼의 어머니(海尺)였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에는 원래 바윗돌이 없는데 어인 까닭으로 까치들이 몰려서 울꼬?” 하고는 배를 저어가서 찾아보니 웬 배 한 척 위에 까치들이 몰려 있었다. 배 한가운데에는 궤짝이 한 개 있는데 길이가 20척이요 너비가 13척이었다.
그녀는 배를 끌어다가 어떤 나무숲 아래 가져다주고 좋은 일인지 언짢은 일인지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하여 맹세를 하고 난 뒤 궤짝을 열어보니 단정하게 생긴 웬 사내아이가 들어 있고 겸하여 가지각색의 보물(七寶)과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녀가 이레 동안 그 아이의 바라지를 하였더니 그제야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우리 나라에는 일찍부터 28용왕이 있어 사람들의 태로부터 나서 다섯 살, 여섯 살적부터 왕위를 계승하여 만백성들에게 천품을 닦도록 교화하였으며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가 임금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나의 부왕인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 왕녀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자식 낳기를 기도하였더니 7년 후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다. 이에 부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으고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다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아마도 좋은 일이 아닌가 보다’ 하고 곧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겸하여 가지각색의 보물과 노비들을 배에 싣고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인연 닿는 땅에 네 마음대로 닿아 나라를 세우고 가문을 만들라’ 하였다. 때마침 붉은 용이 있어 배를 호위하면서 이곳까지 왔노라”고 하였다.
▲진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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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 중원(中元) 2년 정사(57) 6월에탈해가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이것이 옛날(昔) 우리 집이고” 하면서 남의 집을 빼앗았다고 하여 성을 옛 석(昔)자로 하였다. 혹은 까치 때문에 궤짝을 열었으므로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를 떼어버리고 석씨로 하였다기도 하며 궤짝을 풀고(解) 알을 벗고(脫)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 하였다고도 한다. 임금 자리에 있은 지가 23년이요 건초(建初) 4년 기묘(79)에 죽어서 소천(疏川) 둔덕 가운데 장사하였다.
<삼국유사 제4대탈해왕(第四代脫解王)조>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 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鞰櫝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진리해변
▲진리해변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즉위년조>
그런데 1845년 당시 석씨일족들에 의해 현위치가 지정될 때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에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의 기록을 근거로 하였다면, 신라시대 이래로 한번도 지명이 변경되지 않은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일대의 진리(津里) 또는 하서천(下西川)일대로 비정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서지촌에서 북쪽으로 10리 이상 떨어진 나아천 하구의 현위치에다 시조의 탄강지로 위치를 정한 것이다.
당시 촌(村)이라는 단위집단의 범위가 10리 이상의 규모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석탈해의 도래지는 하서리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당시 동해안 일대의 대표적인 촌은 내아촌(乃兒村), 상서지촌(上西知村), 하서지촌(下西知村)등 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석탈해의 도래지는 나아리가 분명한 내아촌의 아진포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아촌과 하서지촌 사이에는 상서지촌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하서지촌 아진포는 내아촌과 바로 연결될 수 없다. 따라서 하서지 일대에 도착한 석탈해 집단은 북으로 이동하여 양남면 나아리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최초의 도착지점은 중요시되지 않고 세력을 키운 나아리 일대가 기억에 남게된 것 같다.
▲진리해변
▲진리해변
<201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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