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중원서원문화권

보은 삼년산성 서문터

蔥叟 2014. 11. 30. 06:55

보은 삼년산성 서문터

 

보은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문터

 

十三年, <三年山城>.[<三年>, 自興役始終, 三年訖功, 故名之.]

13, 삼년산성[삼년이란 공사를 시작한지 삼년만에 끝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을 쌓았다.

 

<삼국사기 자비왕조>

 

八年, 春正月, <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8년 봄 정월,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의 두 성을 개축하였다.

 

<삼국사기 소지왕조>

 

삼국사기의 삼년산성 축성기록과 개축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왕성이 축조된 기록이나 산성이 축조된 기록은 있지만 그 실체가 확실히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여러 성터들 가운데 그 축조된 연대를 확실히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산성에 해당된다. 이를 통해 5세기 후반 신라의 축성기술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삼년산성을 기준으로 그 이후 산성의 발달과정을 비교할 수도 있다. , 삼년산성은 우리 산성역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서문터

 

十五年, 秋七月, <百濟><明襛><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百人, 匹馬無反者.

15년 가을 7,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7923,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다. 유수 유인원이 당 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의 남령에 올라가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 성읍을 약탈하였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28, 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당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문도가 황제의 선물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하여 의식을 마무리 하였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

 

▲서문터

 

14년 봄 3,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 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 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 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삼국사기 헌덕왕조>

 

▲서문터

 

○본래 ‘三年山郡’인데 경덕왕이 삼년군이라고 고쳤으며, 고려 때에 보령(保齡)으로 고쳤다. …… 본조(조선) 태종 6(1406)에 보령현()과 음이 서로 비슷하다 해서 지금 이름(보은)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오정산성(烏頂山城) :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니,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인데, 쌓은지 3년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6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

 

○ 고려 태조 11년에 몸소 이 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淸州)로 거동했었는데, 산 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령현 조>

 

▲서문터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능선이 옴폭하게 꺼지듯 내려온 계곡에 위치한 서문지에 오르면 높이 20여 미터 폭 8~10m에 이르는 웅장하고 견고한 산성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서문지는 삼년산성의 정문으로 산성 밖으로 통하는 주문이었다. 서문지에는 삼년산성 성벽의 비밀인 가로세로 엇갈림 쌓기를 엿볼 수 있다. 가로 60cm, 세로 40cm, 높이 10cm 정도의 직사각형의 잘 다듬은 판석을 한층은 가로로 한층은 세로로 엇갈려 쌓음으로서 그 견고함을 더하였다. 특히, 일반적으로 성벽의 안쪽을 잡석이나 흙으로 쌓아 넣는데 비해 성벽의 넓이가 최대 10m인 삼년산성은 모든 성벽의 내부까지도 차곡차곡 성돌로 쌓아 채운 것이 특징이다.

 

서문지에서는 고대 산성의 성문구조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서문지에는 문짝을 끼워 넣던 신방석과 주초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산성과 달리 문이 밖으로 열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삼년산성이 방어형이 아니라 공격하는 적들을 향해 갖바기 쏟아져 나갈 수 잇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서문지에는 문지방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잇다. 조사에 따르면 수레 양쪽 바퀴 사이의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다.

 

▲서문터

 

▲서문터

 

 

 

<2014.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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