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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금당 석등

蔥叟 2014. 4. 30. 06:05

청도 운문사 금당 석등

 

   운문사 대웅보전 남쪽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에 금당이 있다. 금당이라 편액하였지만 부처님을 모신 불전은 아니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이다. 이 금당 앞에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있으니 이를 금당 석등이라 부른다. 이 석등을 보려면 스님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하나만 세우는 것이 경전의 정신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이라는 경전에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등은 부자가 바친 만 개의 등보다도  더 존대한 공덕이 있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 여기서 '가난한 여인의 등불(貧者一燈 또는 貧女一燈)'이라는 설화를 통해서 등불을 밝히는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 보자.

 

   석가모니 당시 사위성에는 홀로 사는 아주 가난한 노파가 있었다. 하루는 온 성안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환호하는지라 까닭을 물었다. 사람들은 '오늘이 부처님께서 사위성으로 오시는 날이라 밤이 되면 수많은 등불을 밝히며 부처님을 맞을 것' 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노파는 등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하지만 곧 비탄을 떨쳐버리고 구걸을 해서라도 부처님께 공양할 등불을 밝히리라 마음 먹었다. 노파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 두닢을 겨우 구걸하여 기름집을 찾아갔다. 기름집 주인은 기름을 쓰임새를 물었다. 노파가 답하기를 "부처님 계신 세상에 태어났지만 너무 가난하여 지금껏 아무 것도 공양하지 못했는데 오늘 부처님을 맞아 하나의 등불이나마 밝혀 공양하고자 한다" 하였다. 기름집 주인은 크게 감동하여 갑절이나 많은 기름을 주었다.  

 

   노파는 기쁜 마음으로 등불을 밝히고 기도하였다. "저는 가난하여 이 등불 밖에는 공양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이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성불하여 그 지혜의 빛으로 모든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게하여지이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다름 등불은 하나 둘 꺼져 갔으나 노파의  등불만은 더욱 밝게 빛났다. 날이 밝아오자 부처님의 제자들이 신통력으로 꺼지지 않은 등불을 끄게 하였다. 모든 등불이 꺼졌지만 노파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마음씨 착하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밝혀진 등불이기에 꺼지지 않는 것이다. 이 등불의 공덕으로 그 노파는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한결같은 정성이 깃든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노파가 30겁(劫) 후에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아사세왕수결경>

 

   운문사 금당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 형태인 팔각형의 석등이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지대석은 네모난 형태이고 그 위의 부재는 모두 팔각을 이루고 있다. 지대석과 연화대석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잎을 새긴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전체적으로 보아 이 석등은 각부의 균형이 잡히고 조각도 우아한 아름다운 석등이다. 상하대석 연꽃모양의 장식적 요소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수법으로 석등의 조성연대가 8세기 이후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운문사 금당

 

▲석등

 

▲석등

 

▲석등

 

▲화사석

 

▲간주석

 

▲하대석

 

 

 

<2014.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