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서라벌의 봄 - 경주 보문 진평왕릉

蔥叟 2014. 4. 24. 01:23

서라벌의 봄 - 경주 보문 진평왕릉

 

   보문들에도 봄이 왔다. 들판 곳곳에 파릇파릇 세싹이 피어나고 버드나무에도 연녹색의 잎이 고개를 내민다. 낭산의 동쪽 보문들판 가운데 숲 속에 진평왕릉으로 전하는 고분이 있다. 왕릉의 봉분 높이는 7.91m, 직경은 36.46m이며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봉분의 둘레에는 검은색을 띤 괴석과 화강암을 섞어서 호석을 축조하였고 봉분 남쪽과 동쪽에는 호석에 기댄 받침석도 확인된다.

 

   보문들판은 조선시대가는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노는 땅이었다. 그래서 閑地原이라 불렀다. 그것은 북천의 홍수 때문이었다. 북천은 신라시대 이래로 게속되는 홍수로 말미암아 왕경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경주 부윤은 홍수를 막는 것이 큰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북천에 제방을 설치하고 숲을 가꾸어 오리숲(五里藪)이라 했고 보문들에는 수로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평왕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五十四年, 春正月, 王薨. 諡曰<眞平>, 葬于<漢只>.

54년 봄 정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전>

  

   신라 육부 가운데 한지부(漢只部 또는 韓歧部)에 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한지부의 '한지(漢只)'와 한지원(閑地原)의 '한지'가 발음이 같음에 주목하여 조선영조 6년(1730년)에 이곳을 진평왕릉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한기부로 볼 수 있는 기록도 보인다.

    

○孝女<知恩>, <韓歧部>百姓<連權>女子也.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 효녀지은조>

 

芬皇寺之東里有女, 年二十左右 

분황사 동쪽 마을에 20세 가량의 여인이 있었다.

 

<삼국유사 빈녀양모조>

 

   비록 삼국유사에 20세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효녀지은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 따라서 삼국사기에는 지은이 한기부 사람이라하였고 삼국사기에는 분황사 동족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하므로 이곳이 한기부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이곳이 한기부였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31대 신문왕릉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낭산동쪽에 장사지냈다(葬狼山東)"이라 하였으니 이곳이 신문왕릉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왕릉의 양식은 무열왕릉과 같은 호석과 호석받침돌이 등장하고 있으며 규모도 무열왕릉(높이 약 8m)과 비슷하며 넓은 능역을 가진 단독릉이어서 무열왕릉 전후의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므로 진평왕릉과 신문왕릉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진평왕릉

 

 

 

<2014.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