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의 봄 - 경주 낭산 황복사터 삼층석탑
경주분지의 동편에 나지막히 솟아있는 낭산의 동북쪽 기슭에 황복사터가 있다. 지금은 삼층석탑 한 기가 외로서 서 있지만 절의 이름이 뜻하듯이 왕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한 원찰이었다. 이곳에서는 왕복(王福), 또는 황복(皇福)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편이 발굴되었고 또 이곳에 남아있는 탑과 탑 속에서 나온 유물에 의하여 황복사(皇福寺)임이 분명하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며,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21세 또는 29세에 출가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주지역에서 큰스님이 출가 장소가 알려진 곳은 이곳 뿐이다.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에는 여러 가지 신이(神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에 제자들과 탑돌이를 하였는데 매양 발자국이 허공에 떴으며, 층계를 밟고 오르지 않으므로 그 탑에는 돌층대를 만들지 않았으며, 제자들도 섬돌 위를 석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이때에 의상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연코 괴변으로 여길 터이니 세상에 이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의상전교(義湘傳敎)조>
의상이 층계를 밟지 않고 탑에 올라갔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 탑은 현재 남아있는 석탑이 아니라 목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층계가 있는 탑은 목탑이기 때문이다. 즉 의상과 그의 제자들은 목탑에서 예불을 올렸을 것이다. 의상대사 당시에 있던 목탑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없어졌고 현재의 삼층석탑은 692년에 건립되었다. 다만 의상이 예불을 올렸던 목탑을 헐고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는지 아니면 목탑을 그대로 둔 채 따로 삼층석탑을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목탑은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발굴을 통하여 목탑 유구(遺構)의 출현 여부에 따라 확실한 경위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이 서있는 동쪽이 금당터인데 현재 금당터는 흙에 묻혀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동향한 절터임은 확실하며 금당이 탑의 앞에 있고 탑이 금당의 뒷편에 있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신라시대 가람배치의 기본이었던 일탑삼금당 또는 통일 후의 쌍탑일금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정연하게 배치되던 정형에서는 벗어난 방식이지만 산을 이용해서 지세에 맞게 건축한 양식으로 통일 초기에 유행하던 것이다. 나원리 절터나 고선사터도 이와 같은 정형에서 벗어난 가람배치 방식의 절이었다.
1943년에 이 삼층석탑은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사리장치가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 사리함 외벽에 사리함기(舍利函記)가 새겨져 있어 이 석탑이 신문왕을 위하여 692년에 세워졌으며 706년에는 무구정광다라니경과 불사리 그리고 순금제 미타상을 안치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중국에서 702년에 번역된 조탑경(造塔經)으로 706년에 신라에 수입되어 실행되었다는 것은 당의 문화가 신라에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수입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원리 오층석탑에서도 다라니경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나원리 오층석탑도 동시대에 조성된 탑임을 알 수 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
○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太后 孝照大王, 奉爲宗廟聖靈, 禪院伽藍, 建立三層石塔. 聖曆三年庚子六月一日, 神睦太后, 遂以長辭, 高昇淨國, 大足二年壬寅七月卄七日, 孝照大王登霞. 神龍二年 丙午五月卅日, 今主大王, 佛舍利四 全今彌陀像六村一軀 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 安置石塔第二層. 以卜以此福田, 上資神文大王 神睦太后 孝照大王, 代代聖廟, 枕涅槃之山, 坐菩堤之樹. 隆基大王, 壽共山河同久, 位與軋 川等大, 千子具足, 七寶呈祥. 王后, 體類月精, 命同劫數,內外親屬, 長大玉樹, 茂實寶枝. 梵釋四王, 威德增明, 氣力自在, 天下泰平, 恒轉法輪, 三塗勉難, 六趣受樂, 法界含靈, 俱成佛道.
神文大王이 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功을 이루고는 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神睦太后와 孝照大王이 받들어 宗廟의 신성한 英靈을 위해 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孝照大王도 승하하였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
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大王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의 둘째층에 안치하였다. 이 福田으로 위로는 神文大王과 神睦太后 孝照大王의 대대 聖廟가 열반산을 베고 보리수에 앉는데 보탬이 되기를 빈다. 지금의 隆基大王은 수명이 江山과 같이 오래고 지위는 閼川과 같이 크며 천명의 자손이 구족하고 칠보의 상서로움이 나타나기를 빈다. 王后는 몸이 달의 정령과 같고 수명이 劫數와 같기를 빈다. 내외 친속들은 옥나무처럼 장대하고 보물 가지처럼 무성하게 열매맺기를 빈다. 또한 梵王 帝釋 四天王은 威德이 더욱 밝아지고 氣力이 자재로와져 천하가 태평하고 항상 법륜을 굴려 三塗의 중생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六道 중생이 즐거움을 받으며 法界의 중생들이 모두 佛道를 이루기를 빈다.
<황복사 금동사리함기>
황복사터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탑의 양식적 편년은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황복사탑으로 이어지는데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은 거의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다만 고선사탑에는 감은사탑에서 볼 수 없는 문비(門扉)가 1층 몸돌에 새겨져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1층몸돌 이하는 판석을 조립하여 면석을 만들었고 2층 이상은 통돌로 만들어졌으나 황복사탑은 기단부만 판석을 조립하였고 1층몸돌 이상은 통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소 시대가 떨어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탑신부
▲탑신부
▲기단부
그러나 두 탑에서 모두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순금불상이 출토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순금불상은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왕실의 원찰에 봉안되는 불상의 양식은 당대 최고의 유행을 반영하였을 것이므로 통일 후에도 당분간은 시무외여원인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외함의 글씨체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서체와 같기 때문에 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기단부
<201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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