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탑골공원 손병희선생상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자(字)는 응구(應九)이며, 망명 중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 최시형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충청도 청주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때문이었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운동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손병희 선생상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서도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 신도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졌고,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귀국 후에는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
▲손병희 선생상
<201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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