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호국사찰 - 경주 사천왕사 서목탑터
사천왕사(四天王寺) 서탑(西塔)은 탑의 종합예술이라 일컬어진다. 기단은 석조를 이용했고, 그 위에는 다시 전돌(벽돌)을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는 지금은 비록 볼 수 없으나 목조 건축물이 있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목탑이었음이 분명하나, 지금은 기단(基壇) 밖에 남아있지 않은 서탑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났다. 평면 정사각형인 서탑지 발굴에서 밝혀진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종래 한국 불교건축계에서는 전혀 존재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건축양식이며, 또 하나는 학계 일부에서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고도 주장도 있다.
▲서목탑터
조사결과 서탑지는 기단은 돌과 흙, 깬돌을 이용해 축조했다. 기단 테두리는 매우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마치 나무상자를 짜듯이 연결했으며 그 안쪽에는 흙과 자갈을 섞어 바닥 다짐을 했다. 이 장대석 기단 위로는 최대 3겹까지 전돌이 켜켜이 포개진 채 쌓아올렸다. 심초석(탑 중심 기둥돌)이 위치한 지상 높이를 고려할 때 원래 전돌은 12-13겹까지 포개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천왕사 서탑터는 '석조 + 전돌'의 혼합양식이 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지만 중국의 경우 불탑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나 일반 건축물에서는 더러고 있다고 한다..
석조와 전돌로 떠받치는 단 위에는 탑 몸체에 해당하는 목조 탑신이 있었을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보아 사천왕사 탑은 석조와 전돌과 목조가 한데 어우러진 건축물이다. 전돌로 쌓아올린 벽 사이사이에는 녹유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사천왕상은 각 벽면마다 4구씩 안치하였고 서탑만 해도 모두 16구에 이르는 사천왕상을 조각한 셈이다. 종래 불탑에서 사천왕상은 1구, 혹은 4구가 안치되는 것이 정상이었기 대문에 놀라운 것이다.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에 대해 문명대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미술사학자는 그것이 사천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팔부신중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강우방 선생은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팔부신중은 9세기가 되어야, 아무리 빨라도 8세기 말 이전에는 나올 수 없다면서 사천왕사지 녹유사천왕상 또한 악귀를 밟고 있다는 점에서 사천왕상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문명대 선생은 삼국유사 관련 기록을 중시해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화상전(綠釉畵像塼. 녹색 유약을 바르고 그림을 그린 벽돌)이 묘사한 신상(神像)은 팔부신중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서목탑터
사천왕이란 원래 고대 인도 종교에서는 귀신들을 지배하는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한 다음에는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 중턱 지점의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는 방위신이기도 하다. 즉, 동쪽을 담당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增長天), 북쪽의 다문천(多聞天. 곤사문천<昆沙門天>이라고도 함)이 그들이다. 한국 불교에서는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인 천왕문에서 흔히 목조각상 형태로 만날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발밑에 깔려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노선을 걷는다. 그러나 당나라사천왕은 불교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중턱인 사왕천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그러므로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사는 수미산의 기슭이며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은 수미산인 것이다. 신라인들이 호국의 의지로 사천왕사를 세우면서 신라에는 사천왕신앙이 들어왔으며 이후에 사천왕 조각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사천왕사에서 소조 사천왕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바로 양지(良志)라는 스님이었다. 양지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상반신이 깨어진 채로 남아있다. 이 소조 사천왕상은 삼국통일 후 사천왕사 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것인데 그 힘차고 정교한 솜씨는 통일신라가 힘찬 새 출발을 시작하면서 만든 회심의 명작이다. 양지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중 양지는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으나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그 행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지팡이 머리에 베 자루 한 개를 달아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간다. 지팡이가 흔들려 소리가 나면 그 집에서 이것을 알고 재 올릴 비용을 집어넣는다. 자루가 다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사는 절 이름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으니 그의 신통하고 이상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다.
▲서목탑터
그는 여러 가지 재주에 두루 능통하여 비할 바 없이 신묘하며 글씨도 잘 썼다. 영묘사(靈妙寺)의 장륙삼존, 천왕상 및 전각탑의 기와와 천왕사탑 아랫도리의 8부 신장, 법림사(法林寺)의 주존 삼불, 좌우의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 만든 것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이름 현판도 그가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한 개를 만들고 이와 함께 부처 3,000개를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가운데 두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빚어 만들 때에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가 잡념 없는 상태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중 남녀들이 다투어가면서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양지석장(良志錫杖條)조>
그는 소조(塑彫)의 명수였다. 작은 금동제이지만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는 감은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외함의 사천왕상도 그가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천왕사, 영묘사, 안압지에서 나온 힘차고 화려한 기와(瓦塼)들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진흙의 요술쟁이였던 것이다. 강우방은 우리의 위대한 조각가 양지의 이름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개탄하고 있다.
「여러분은 작품도 거의 남이 있지 않은 김생(金生)이나 솔거(率居)는 알면서,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 위대한 예술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 천재가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사나이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없으니 여러분은 알 턱이 없지요. 아들이나 친구에게 물어도 귀에 설어 오히려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우리는 이제 위대한 양지라는 예술가를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이름처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 양지(良志)를 왜 모르십니까.」
▲심초석
<201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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