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신당리 신라고분
경주 신당리에서 왕릉급에 속하는 통일신라시대 호석(護石)을 두른 석실분(石室墳)이 발견됐다. 이 무덤은 그것이 자리 잡은 위치나 구조, 그리고 크기 등에서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위치하는 통일신라말 전민애왕릉과 여러모로 흡사하다. 원형 봉토분인 이 고분의 봉분 바깥으로는 3단 석축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돌리고, 일정한 구간마다 받침돌을 세웠다. 무덤 주인공을 매장한 석실(石室)은 봉토 중앙에서 발견됐다. 호석 기준으로 고분은 지름 14.7m이며, 둘레는 현재 4분의 1 정도가 유실되고 35.5m가량 남았지만 원래는 46.3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호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붙인 받침돌은 대체로 120-178㎝ 간격으로 모두 12개가 확인됐다. 받침돌은 길이 125㎝, 폭 35㎝가량이며, 호석과 맞닿은 상부 부분에는 빗금을 치듯이 돌을 잘 가공하였다.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라 받침돌은 원래 정확히 몇 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를 감안할 때 모두 24개를 안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은 무덤 전면으로 통하는 통로를 별도로 마련한 횡혈식 석실분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최근 개최된 전문가 검토회의를 토대로 문화재청이 현장 보존을 결정한 상태에서 조사가 중단된 상태라 정확한 구조나 내부 유물 현황 등은 현재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석실은 현재 양상으로 보아 내부는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봉분 앞쪽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호석에서 120㎝ 떨어진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돌로 만든 상(床) 모양 시설물인 상석(床石)이 있던 흔적도 완연히 드러났다. 이 상석은 편평한 상부 판석은 없어졌지만, 그 하부 구조는 평면 장방형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규모는 동서 216㎝, 남북 133㎝였다.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봉분 뒤편 북쪽에는 봉분을 활 모양으로 감싼 대형 축대가 발견됐다. 이 축대는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만 46.5m, 현존하는 높이 104-138㎝에 이른다. 나아가 이 축대 안쪽을 따라 폭 90㎝가량 되는 배수로 시설도 확인됐다. 규모가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형인 봉분은 그 테두리를 장방형으로 곱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호석(護石)은 받침돌에 해당하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3단을 쌓아올렸다. 계곡 쪽 봉분 상당 부분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지점 조사 상황을 보니 대단한 정성을 기울여 조성한 무덤이다. 호석 바깥으로는 일정한 구간마다 비스듬히 기대어 세운 받침돌이 질서정연한 모습이다.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매장 주체시설은 봉분 정중앙 지점에서 발견됐다. 거기에서 함몰된 구덩이가 발견되고, 석실 천장을 덮었을 덮개돌도 사라진 정황 등으로 볼 때 이미 이 무덤은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았음에 틀림없다.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는 봉분 전면 남쪽에는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장방형 돌무더기 시설이 확인됐다. 이는 왕릉을 비롯해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는 흔히 보이는 상석(床石)이라는 돌상 모양 시설물이 있던 흔적이다. 이런 상석은 조선왕릉에서도 '혼유석(魂遊石)'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시설물이다. 상석은 그 위를 장식했을 편평한 돌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라 무덤에서는 이런 상석이 거의 예외 없이 봉분 남쪽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는 정남쪽에는 무덤방으로 향하는 길을 별도로 마련하기 때문이다.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봉분 뒤편 야산 쪽으로는 수직으로 쌓아올린 돌 축대가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축대는 봉분을 뒤에서 감싸듯 활 모양으로 굽어진 호형(弧形)이다. 이 축대 안쪽을 따라서는 폭 90㎝가량인 배수로 시설도 드러났다. 배수로는 길게 이어져 축대와 봉분을 감싸다가 이 고분 서쪽 지점에 인접한 또 하나의 거대한 봉토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또 하나의 봉토분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업대상지 경계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업 대상지에 포함된 봉분 구역에서는 트렌치(시굴 조사 구덩이) 하나를 가볍게 넣은 흔적이 있었다. 그 트렌치 사이로 돌이 노출됐다. 그리고 그 봉분 중앙 정상부에는 거대한 함몰 구덩이가 있었다. 아마 도굴한 흔적으로 보인다.
▲신당리 고분
▲신당리 고분
▲상석
이 고분은 위치라든가 무덤 구조 등에서 민애왕릉으로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과 대단히 흡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傳) 민애왕릉이 과연 신라 왕릉이라면, 이 고분 또한 왕릉임에 틀림없다. 다만 전 민애왕릉을 왕릉이라고 최종 단정하지 못하듯 이번 신당리 봉토분 또한 왕릉급 혹은 그에 준하는 최고 지배계층이 묻힌 곳 정도로 파악된다. 축조시기는 석실 내부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가늠이 힘들다.
▲상석
▲상석
▲동북모서리
조사단에서는 "8세기 중반 무렵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고고학자는 "9세기 무렵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9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8세기 왕릉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왕릉이 아직 밝혀진 바가 전혀 없을 뿐더러 출토된 진단구가 8세기의 것이라 하더라도 미리 만들어진 것을 후대에 매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고뷴이 왕릉급 무덤이라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왕릉이 틀림 없다고 여겨진다. 신라시대에는 왕을 제외한 어떤 신분도 돌을 다듬어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축대
▲매장주체부
▲매장주체부
○眞骨: ...(중략) ... 不磨階石, 不置三重階 ...(하략) ...
진골은, ...(중략) ... 계단 돌을 갈아 만들지 못하며, 3중의 돌층계를 놓지 못한다...(하략) ...
○六頭品: ...(중략) ... 不置巾{中}階及二重階, 階石不磨, ...(하략) ...
6두품은 ...(중략) ... 중계와 이중 층계를 설치하지 못하며,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五頭品: ...(중략) ... 不磨階石, ...(하략) ...
5두품은 ...(중략) ...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四頭品至百姓: ...(중략) ... 階砌不用山石 ...(하략) ...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중략) ... 층계와 섬돌에 산돌을 쓰지 못한다. ...(하략) ...
○外眞村主與五品同, 次村主與四品同.
외진촌주는 5품과 같으며, 그 다음 촌주는 4품과 같다.
<삼국사기 잡지 屋舍조>
▲매장주체부
▲배수구
▲지진구 출토지
진골 이하 어떤 계급도 돌을 갈아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돌을 깨어서 사용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돌을 갈아서 만든 12지신상이 있는 고분은 왕릉임에 틀림없다.
고분 인근에서는 이와 흡사한 규모의 또 다른 대형 봉토분이 확인됐다. 이 고분은 아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석실 내부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까닭에 이 무덤이 언제쯤 만들어졌는지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8세기 중반 무렵이 아닐까 추정되며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최고 신분층의 무덤임은 확실하다. 조사한 봉토분과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봉토분은 모종의 세트를 형성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부부라든가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관계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신라시대 왕릉 가운데 두 기의 왕릉이 같은 장소에 조성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47대 문성왕릉과 48대대 헌안왕릉, 그리고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진구 출토지
▲지진구
○五年, 春正月,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5년 봄 정월, 이 달 29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안왕전>
○十九年, 秋九月, 越七日, 王薨. 諡曰<文聖>, 葬于<孔雀趾>
19년 가을 9월, 왕이 7일 만에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전>
○十二年, 秋七月五日, 薨. 諡曰<憲康>, 葬<菩提寺>東南.
12년,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전>
○二年, 秋七月五日, 薨. 諡曰<定康>, 葬<菩提寺>東南.
2년,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정강왕전>
만약 이곳이 신라시대의 공작지였다면 이 두 고분은 문성왕릉과 공작일 것이며, 이 고분 서북쪽에서 보리사라는 절터가 있었음이 밝혀진다면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이 될 것이다.
▲지진구
▲지진구
<201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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