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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을 찾아서 - 남양주 광릉 세조대왕릉

蔥叟 2013. 1. 29. 08:45

광릉을 찾아서 - 남양주 광릉 세조대왕릉

 

   광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이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릉이지만 광릉의 조영시기가 이보다 앞선다. 동원이강릉은 정자각을 기준으로 두 개의 다른 사초지 언덕()을 좌우로 조성하여 왕과 왕후가 각각의 언덕에 모셔져 있는 능침형식이다. 동원이강릉에서 왕의 능침은 오른쪽(祔右岡)에 왕후의 능침은 왼쪽(祔左岡)에 조성한다.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는 경사가 심한 사초지(莎草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강()이라고 하며 언덕이라는 뜻이다. 조선왕릉이 삼국시대의 왕릉과 가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잔디로 이루어진 언덕 위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이 부분을 인공석축으로 조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자연의 능선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잔디를 심었다. 사초지는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여 백성의 노고를 줄여주면서 왕릉의 위엄은 높여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사초지를 오르면 능원이 펼쳐진다. 능원은 크게 초계, 중계, 하계의 3계로 나뉘어지고 각 계마다 배치되는 석물이 정해져 있다. 하계에는 갑옷을 입은 무인석 1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장검을 빼어 두 손으로 짚고 서서 위엄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계에는 중앙의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무인석은 도포를 입고 관을 썼으며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 마지막 초계의 봉분 바로 앞쪽에 상석이라고 부르는 혼유석을 놓았고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혼유석은 선왕의 혼령이 나와 쉬는 곳이다. 정자각에서 제사를 올릴 때 혼령이 나와 앉아 제사를받는 곳이기도 하다. 혼유석 아래에는 귀면을 새긴 고석이 받치고 있다. 귀면은 사한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 조각한 것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내렸다. 이 유명에 따라 광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난간석은 외부에서 능침공간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기능을 하는 석물이다. 조선왕릉 가운데 재위 왕의 왕릉에는 난간석은 반드시 두었다. 난간석이 바로 왕릉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난간의 기원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유래하며 신라왕릉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난간석은 12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을 석주(石柱)라 하고, 석주와 석주 사이를 가로지른 장대석을 죽석(竹石), 중석의 중간 부분을 받치고 있는 작은 작은 기둥을 동자석주(童子石柱)라 한다.

 

   난간석 밖으로는 석양과 석호를 각각 2쌍씩 배치하여 능침을 호위하게 하였다. 석양은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 능침주변으로 동,서,북쪽 3면에 기와를 덮어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장인 곡장을 둘렀다. 광릉은 이후 왕릉조성의 모범이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역에 동원된 인력을 줄일 수 있었으며, 비용을 절감하여 민폐를 덜게 되었다.

 

▲광릉 전경

 

▲세조대왕릉 사초지

 

▲사초지

 

▲능원

 

▲능원

 

▲능침

 

▲무인석

 

▲무인석

 

▲장명등

 

▲문인석

 

▲문인석

 

 

 

▲망주석

 

▲곡장

 

▲곡장

 

 

 

<2013.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