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화청지 양귀비상
화청지 한켠에 양귀비상이 서 있다. 풍만한 몸에 반라의 모습의 양귀비상은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귀양까지 보낼 정도면 이태백의 시가 아마도 맞았던 모양이다.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 : 712~756 재위)의 귀비(貴妃). 현종이 그녀에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당조(618~907)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명한 중국 시와 희곡의 주제가 되어왔다. 고관의 딸이었던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절세의 미인으로 통하는 몇몇 풍만한 체구의 여인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현종 아들의 비였으나 그녀에게 매혹된 60세의 현종은 아들에게 그녀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얼마 후 그녀의 두 자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재상이 되었다.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군 안녹산(安祿山)은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그녀는 그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지닌 안녹산은 20만 대군의 통수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양국충의 권세를 질투하여 황제를 배반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반란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다. 도망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했다.
▲양귀비상
▲양귀비상
▲양귀비상
▲양귀비상
▲양귀비상
<2009.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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