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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흥평시 한무제 무릉(汉武帝茂陵, Màolíng)

蔥叟 2009. 9. 21. 08:26

중국 흥평시 한무제 무릉(武帝茂陵, Màolíng)

  

   중국 산시성(陕西省) 셴양(咸阳)에 있는 한(漢) 무제(武帝) 유철(刘彻)의 묘(墓)이다. 싱핑셴(兴平县)] 북동쪽의 난웨이전(南位镇)에 있다. 서한(西汉)의 왕릉(帝王陵)은 당대(唐代)의 것과 달리, 대개 평지에 높고 거대하게 쌓아 놓은 봉토(封土)무덤이다. 높이는 약 45m이며 계단을 이용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봉토(封土) 바로 옆에 곽거병(霍去病)의 배장묘(陪葬墓)가 있다. 묘(墓)앞에는 십여개의 대형 돌 조각상이 있다.  

 

▲무릉(茂陵)

 

▲무릉(茂陵)

 

▲무릉(茂陵)

 

   무제는 중국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재위, BC 141- BC 87)로서 휘는 유철(劉徹)이다. 제후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한(漢)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무제는 즉위 후 전대(前代)의 권신(權臣)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 170?~BC 120?)의 현량대책(賢良對策)을 받아들여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하였으며,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 태학(太學)을 설치했다.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에 박사(博士)를 두고, 그 아래 각 10명 씩의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을 두어 매년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인물을 관리 후보인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BC 134년에는 지방의 군국(郡國)에서 효행(孝行)이나 청렴(淸廉)한 덕목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을 천거받아 낭중(郎中)으로 임명하는 효렴(孝廉)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문신 관료 중심의 유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릉(茂陵)

 

▲무릉(茂陵)

 

▲무릉(茂陵) 능비

 

   또한 무제는 경제의 정책을 계승해 제후왕(諸侯王)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좌관율(左官律)을 제정하여 제후왕국에 파견된 관리가 제후왕(諸侯王)과 사사로이 군신(君臣)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부익율(附益律)을 제정하여 제후왕을 위해 별도의 조세(租稅)를 만들거나 임의로 세액(稅額)을 올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제후왕의 죄를 묵인하지 못하도록 하는 아당율(阿黨律)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중앙의 정책이 제후 왕국에서도 똑같이 시행되었고, 제후왕의 권리는 크게 위축되어 한(漢)의 군국제(郡國制)는 실질적으로 군현제(郡縣制)나 다름 없게 되었다. 나아가 무제는 BC 106년에 수도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13주(州, 혹은 部)로 나누어 각 주(州)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지방관료와 토착세력을 감찰(監察)하게 하였다.

 

▲무릉(茂陵) 능비

 

한무제(汉武帝)

  

▲무릉(茂陵)

 

   이러한 정책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무제는 건국 초기부터 한(漢)을 위협하던 흉노(匈奴)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쳤다. BC 129년 흉노와 전쟁을 시작해 위청(衛靑, ?~BC 106), 곽거병(霍去病, BC 140~BC 117) 등의 활약으로 BC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사막 너머로 몰아냈다. 한편 BC 139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되었던 장건(張騫, ?~BC 114)이 BC 126년에 귀환한 뒤, 무제는 서방 교통로를 중시하여 황허(黃河) 서쪽의 하서(河西) 지역의 장악에 주력하였다. 흉노(匈奴)의 혼야왕(渾邪王)이 투항해 오자 하서(河西) 지역에 4개 군(郡)을 설치하여 서역(西域)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BC 119년 이리(伊犁) 지역의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기 위해 다시 장건(張騫)을 사절로 파견했으며, 장건(張騫) 일행은 서역(西域) 제국의 사절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BC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를 파미르고원(Pamir Plat.) 북서의 페르가나(Fergana)에 위치한 대완(大宛) 정벌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무제의 서역(西域) 진출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릉(茂陵) 

 

▲무릉(茂陵)

 

▲무릉(茂陵)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무제는 남쪽과 동쪽으로도 영토 확장에 나섰다. 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있던 민월(閩越)·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합(倂合)하고, BC 111년에는 번우(番禺, 지금의 廣東)에 도읍한 남월(南越)을 정복해 9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쓰촨성(四川省) 남부로 진출해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등지에 분포하던 염방(冉駹)·수(巂) 작(筰) 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 곳에 6개의 군(郡)을 두었다. 이어 BC 109년에는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BC 108년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키고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郡)의 4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무릉(茂陵)

 

▲무릉(茂陵)

 

▲무릉(茂陵)

 

   그러나 무제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한(漢)은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막대한 군사비가 소모되어 재정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더구나 무제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하여 재정을 더욱 궁핍하게 했다. 무제(武帝)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홍양(桑弘羊, BC 152 ?~BC 80) 등의 상인 출신 관료를 등용하여 새로운 재정 정책을 펼쳤다. BC 119년 소금과 철(鐵)에 대해 전매제를 실시했고, 상인에게 배나 수레를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고, 재산을 허위로 신고하는 자를 엄벌하는 고민령(告緡令)을 제정했다. BC 113년에는 수형도위(水衡都尉)라는 관서(官署)를 설치해 각 군국(郡國)에서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고 독점적으로 화폐를 주조(鑄造)하도록 했다. BC 110년에는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했다. 균수법(均輸法)은 국가가 각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운송하여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방법으로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액을 국가의 수입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BC 98년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가 상인의 역할을 대행하여 재정 확대를 꾀한 것이었으므로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을 엄격히 통제하여 많은 불만을 낳았다. BC 91년 황태자였던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일으킨 ‘무고(巫蠱)의 난(亂)’ 등 정치적 불안도 나타났다. 결국 무제는 BC 89년 대외전쟁을 중지하고 내정(內政)에만 치중하겠다는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2년 만인 BC 87년 무제가 사망한 뒤 소제(昭帝, BC 94~BC 74)가 8세에 즉위하였고 곽광(霍光, ?~BC 68)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뒤 한(漢)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가속화되었고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2009.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