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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화청지(华淸池, Huāqīngchí)

蔥叟 2009. 9. 20. 00:00

 중국 서안 화청지(淸池, Huāqīngchí)

 

   화청지(淸池)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30여㎞ 떨어진 린퉁(臨潼) 남쪽의 리산(驪山) 북쪽 기슭에 세워진 일종의 별궁이며,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유적이다. 화청지(华清池)는 리산의 온천으로 유명하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좋은 지하 온천수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찌기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리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당천궁[]을 지었고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華淸池)

 

▲화청지(華淸池)

 

▲화청지(華淸池)

 

   화청지(淸池)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이다. 현종은 매년 10월 양귀비(楊貴妃)와 이곳에 와서 지내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장안(長安)으로 돌아갔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으로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다. 며느리인 셈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가 죽자, 시아버지란 체통도 망각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를 시킨 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음악에 관한 취미가 맞았던 게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화청궁(華淸宮) 벽화

 

▲장한가 연극 무대

 

▲어탕(御湯)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 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次恨線線無絶期 차한선선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계속 되네

 

   이렇듯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궁지에 빠진다. 당시 서안에는 왕의 근위병 4천여 명이 있을 뿐이었기에 현종은 서쪽의 사천성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들이 지금의 마위파 부근에 왔을 때, 이번엔 같이 가던 호위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호위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맬 비단천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화칭궁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5대10국(五代十国) 때 도교 사원으로 개축되었다. 청나라때 강희제(康熙帝)가 서쪽 지방을 순시할 때 이곳을 지나면서 보수하도록 하여 당시 지어진 누대(樓臺) 등이 남아 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화청지를 황폐화시켰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크기의 7분의 1 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된다. 

 

해당탕(海棠湯)

 

연화탕(蓮華湯)

 

연화탕(蓮華湯)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하며 다량의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한다. 양귀비가 장기간 미모를 유지한 것과 당태종이 육칠십에도 여전히 정력이 왕성했던 것은 화청궁에서 장기간 약수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또 음력 7월 7일 양귀비의 생일잔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주변 각국의 사신들이 선물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높은 지위를 짐작하게 한다.

 

   정원을 돌아서면 목욕탕 유적박물관이 있다. 그 중심에 흰색의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반라의 양귀비 입상이 있다. 여우 가죽을 걸치고 몸을 반쯤 노출한 양귀비가 약간 머리를 숙인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해당탕(海棠湯)은 귀비지(貴妃池)라고도 하는데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이다. 양귀비는 이곳에 한약재와 꽃잎 등을 탕 속에 넣고 목욕을 했다고 한다. 바닥의 옥돌에는 그 주인이 그녀임을 알려주는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나 내려가서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온천수로 채워져 있었을 해당탕은 관광객이 던진 동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연화탕(蓮華湯)은 현종의 전용 목욕탕이라 한다. 해당탕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화청궁(華淸宮)

  

▲현종, 양귀비 생일잔치도

 

▲양귀비 초상

  

▲장한가 공연 포스터

 

 

 

<2009.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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