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가는 길 - 경주 양산재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이 재각건물(齋閣建物)은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6부촌장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여섯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기전 57년에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여섯촌장이 추대하여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 하니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이 되었다. 그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촌장들의 신라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리게 되니 바로 양산촌은 이씨(李氏), 고허촌은 최씨(崔氏), 대수촌은 손씨(孫氏), 진지촌은 정씨(鄭氏), 가리촌은 배씨(裵氏), 고야촌은 설씨(薛氏)이다. 이로써 신라에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 이들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양산재
양산재는 한국사에서 매우 특이한 신화구조를 가졌다. 신라건국의 모체가 된 6촌장들은 모두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들 자신은 건국의 주체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또 다른 천손강림 설화를 가진 혁거세 집단에 의해 밀려난 세력들이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계통의 설화는 천손강림일때 어린아이로 태어나 국가를 수립하고 시조나 왕의 자리에 등극하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보편적인데 반해 육촌장들은 성인의 형태로 강림을 하고 있어 특징적이다. 먼저 경주에 도착해온 이주민인 이들이 뒤늦게 온 세력에게, 경상도 일원의 진한십이국 중의 하나인 사로국 건국의 영광을 물려준 것이다. 즉, 천손강림 설화를 가진 집단은 건국에 성공하여 역사적 실체로서 전면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실패하여 혁거세의 사로국 개국의 보조자인 개국공신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양산재
진한 땅에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로서, 그 촌장은 알평이었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는데 이가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남산부라고 하는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이니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엔 이산에 내려오니 여기가 점량부 또는 모량부로 손(孫)씨의 고향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고 하는데 박곡촌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 진지촌 이니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통선부이다.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옛집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후(최치원)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니 촌장의 이름은 호진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이 사람이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로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양산재
그러나 현재 경주 최씨는 최치원을, 경주 손씨는 손순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설씨의 경우 중고기인 설총까지는 외대로 내려오는 실정이다. 삼국사기에는 노례왕 때 6성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성씨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이씨만이 가끔 등장 할 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말려초에 성씨가 일반화된 후 신라 초기까지 소급하여 날조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은 많은 성을 신하들에게 하사했다. 신라시대에는 왕성(王姓)인 박씨, 석씨, 김씨, 그리고 이씨, 설씨가 가끔 등장할 뿐이었다. 왕조차도 성이 없었다고 한다. 법흥왕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모진(慕秦, 募秦)이라고 기록했는데 중국측에서는 이것을 성은 모씨(慕氏, 또는 募氏)이고 이름이 진이라는 뜻으로 성모명진(姓慕名秦)이라고 했을 정도로 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며 진흥왕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김진흥(金眞興)이라고 기록하여 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씨, 해씨 백제의 부여씨 목씨, 백씨 등은 나라가 멸망하면서 따라서 성씨도 사라졌으며 백제의 성씨 일부가 일본에 전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백제의 목(木)씨는 현재 일본에서 「나까무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 모든 국민이 집단적으로 성씨를 갖게 되는 것은 1700년대 이후에 족보가 일반화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가질 수 있었던 양반은 10~15%뿐이었다. 그러나 1700년대부터 나머지 85~90%의 국민이 족보를 위조하고 양반화의 길을 걸었으며 이때 양반에 편입하면서 대성인 왕성 김, 이, 박씨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족보에 이름이 들어있으면 군대도 안가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니 문중에서 만든 사문서인 족보가 공문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양산재
양산재의 구조는 외삼문인 대덕문을 지나면 동편의 윤적당과 서편의 익익재를 좌우로 하고 내삼문인 홍익문이 있다. 홍익문 안에 입덕묘가 있다. 대체로 이러한 구조는 조선시대의 서원 구조와 일치하며, 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칭 또한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입덕묘에는 육성씨족의 시조인 이알평, 최지백호, 정소벌도리, 손구례마, 배지타, 설호진 등 여섯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삼국사기에는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이알평, 정소벌도리, 손구례마, 최지백호, 배지타, 설호진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어 양산재의 배치순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느 쪽에도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1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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