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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의 여운 - 보령 성주사터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蔥叟 2012. 10. 12. 00:18

백제문화의 여운 - 보령 성주사터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삼국통일한 후 신라의 불교가 한창 성할 때에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가 달마선법(達磨禪法)을 받아가지고 와서 선승들의 사상과 실천을 반영하여 한국고유의 宗風을 크게 일으켰으며, 신라말에 남종선이 전래되어 신라말 고려초에 걸쳐 아홉 개의 禪門을 열었으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이다. 구산선문 가운데 성주산문은 신라 문성왕때 선사 무염이 개창한 선문.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설악산 오색석사와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서 법을 얻음.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어 무설토(無舌土, 禪을 五惠門, 無說門, 不淨不穢門으로 나눈 선법)의 법문을 열어 선법을 크게 펼쳤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신

  

▲비문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인 성주사터에는 성주산문의 종주이자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낭혜화상은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귀부

 

▲귀부

 

▲귀부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귀부

 

▲이수

 

▲이수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2012.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