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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의 여운 - 보령 성주사터 중앙삼층석탑

蔥叟 2012. 10. 10. 02:12

백제문화의 여운 - 보령 성주사터 중앙삼층석탑 

 

   오층석탑 뒤로는 발굴조사 중인 금당터가 있다. 금당터 한가운데에 불상이 안치되었던 대좌가 남아있는데 이처럼 불상이 금당의 한가운데에 놓였던 것은 예배자들이 부처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3바퀴를 도는 이른바 우요삼잡(右繞三匝)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금당은 예배의 공간이지 법문을 강하던 곳은 아니다. 법문은 법당에서 행해진다. 그래서 법당 또는 강당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파괴되었던 절을 재건하면서 번듯하게 금당과 강당을 갖추 수 있는 여력이 없던 때에 금당 안의 불상을 뒷편으로 들여서 안치하고 그 앞의 공간에서 법문을 강하게 되었다. 그 후에 지어진 절들은 강당이 없어지고 금당이 법당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금당터 뒷편에는 3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서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의하면 정광여래, 약사여래, 가섭여래의 사리탑이라고 하였는데 불교교리상에 이렇게 금당과 강당 사이에 그것도 3기의 탑이 나란히 있는 까닭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중앙삼층석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이중기단 위에 3층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 4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다. 그 위로는 1층의 탑 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다로 끼워두었다. 이 받침돌로 인하여 이 탑은 여느 탑 보다 상큼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의 몸체가 기단부에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이 받들어 모셔져 있다는 공경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마치 귀한 분을 방바닥에 않게 한 것이 아니라 방석 위에 모셔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무짝 모양을 조각하였도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경주 고선사 삼층석탑에서 부터 시작된 탑의 몸돌 문비는 부처님의 집에 사리를 모시고 굳게 문을 닫아 걸었다는 의미이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괸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혀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안타깝다.

 

▲성주사터 삼층석탑

 

▲성주사터 중앙삼층석탑

 

▲탑신부

 

▲기단부

 

▲문비

▲문비

 

▲자물쇠

 

 

 

<2012.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