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의 여운 - 보령 성주사터 오층석탑
이번 답사길도 마무리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번 답사의 백미는 이제부터이다. 좀처럼 백제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그 여운을 느낄 수 있는 답사지가 바로 보령의 성주사터와 부여의 무량사다. 우리의 발길은 절터로만 남아있는 성주사터로 향한다. 성주사터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사적 제307호이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801~888)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취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터, 석등, 오층석탑, 금당터, 그 뒤로 도서로 나란히 있는 동삼층석탑, 중앙삼층석탑, 서삼층석탑이 잇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塑造佛頭)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터 앞에 서 있으며 2중 가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겨 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못리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이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으로 백제지역 석탑에서만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으로 백제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성주사터 오층석탑
▲성주사터 오층석탑
▲성주사터 오층석탑
▲성주사터 오층석탑
▲성주사터 오층석탑
▲탑신부
▲기단부
<201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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