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향기를 찾아서 - 경주 고선사터 서당화상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애장왕(재위 800∼808) 때에 원효(元曉)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779~780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에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실권자인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헌덕왕)의 후원으로 건립한 비이다. 비는 하단부와 상단부가 깨어져서 따로따로 발견되었다. 하단부는 1915년 5월 9일에 조선총독부 참사관실에서 한국금석문의 수집과 정리에 종사하던 일본인에 의하여 경북 경주시 보덕동(普德洞) 고선사(高仙寺)의 옛터에서 3편으로 조각난 채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리고 비신의 상단부는 1968년 옛날 동천사(東泉寺) 터로 전해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부근 농가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그를 서당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은 전하지 않고, 비에 글을 새긴 사람만 음리화(音里火, 경북 상주시 청리면)의 삼천당주(三千幢主)인 급찬(級飡) 고금(高金)으로 되어 있다. 전체 33행에 각 행은 61자로 추정되며, 문장은 전형적인 사륙변려체이다. 비문 내용은 원효의 탄생과 학문 태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의 성격과 원효대사의 신이한 행적, 대사의 명성이 일본에까지 알려졌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는 원효의 일대기를 정리한 최고의 자료로서 현재 원효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원효의 죽은 연월일과 장소를 고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료로서 원효가 686년 3월 30일에 혈사(穴寺)에서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글씨는 행서로 구양순(歐陽詢)체와 비슷하며 그 필체가 뛰어나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남동쪽 모퉁이 고선사터 삼층석탑 앞에는 서당화상비의 귀부로 전하는 비좌 한 구가 남아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귀부가 서당화상비의 귀부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9년 경주박물관에서 원효대사 특별전 개최되었다. 특별전을 위하여 그동안 헤어져있었던 귀부와 비신이 그야말로 수십년만에 해후를 하였다. 그런데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비좌와 비신은 한 초등학생의 눈을 통하여 제짝이 아님이 밝혀졌다. 비신이 꽂혀야할 비좌의 홈보다 비신이 더 커서 비좌 안에 꽂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서당화상비가 발견된 곳이 과연 고선사가 맞느냐? 아니면 덕동호 속에 수몰된 고선사터가 진짜 고선사터가 틀림없는가 하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덕동호 속에 묻힌 고선사는 말이 없지만 역사의 진실을 찾아 확인하는 일이 다시금 펼쳐져야할 것이다.
▲서당화상비
▲서당화상비 비문
▲서당화상비 비문
▲서당화상비 비문
▲서당화상비 비문
▲서당화상비 탑본
▲서당화상비 탑본
▲서당화상비 탑본
▲서당화상비 탑본
▲서당화상비 탑본
▲서당화상비 귀부
▲서당화상비 귀부
▲서당화상비 귀부
<201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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